해 뜨는 동쪽

아침의 나라 한국,



조용하고 조그마한 남쪽 도시, 비단같이 고운 고을 나주.

병인박해 때 순교자들의 성지인 무학당 인근에서 미장원을 경영하고 있는

한가정의 평범한 주부가 모시던 성모상에서 1985년 6월 30일부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우시는 성모상의 나주성모님께서는 1985년 6월 30일부터 1992년 1월 14일까지

무려 700일간에 걸쳐 눈물로 우리를 부르시고 피눈물로 호소하시며,

진땀을 흘리시고 코피까지 쏟으시며 당신의 고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또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성모님의 현존이며 사랑이며 우정이신 장미향기를

만방에 풍겨주시고 온몸을 다 짜내시어 향 기름을 400일간 준비하시어

1992년 11월 24일부터 1994년 10월 23일까지 700일간이나 흘려주셨다.


또한 모령성체에 대하여 경고하시며 성체의 신비를 모든 이에게 전하여 구원받도록

성체에 대한 놀라운 징표도 보여주셨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율리아님을 통하여

1985년 7월 18일부터 현재까지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의 복합적인 사랑의 메시지

말씀을 주셨다.

 

나주 성모님과 성체께 대한 올바른 신심


바다에 사는 연어가 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지 그 이유를 모르면, 그 연어가 어리석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스승께서 십자가의 길을 걷지 마시도록 간곡히 말렸다. 우리의 사고 방식과 개념의 기본틀에 문제가 있을 때에 우리는 현실을 바로 볼 수 없고 엉뚱한 추측과 결론에 이르기 쉽다. 작금에 나주 성모님께 관련하여 온갖 왜곡된 내용들이 유포되고 있는 현황과 관련해서,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2천년 전에 유대 민족이 구세주의 강림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우리 민족이 구세주의 모친을 배척하려는가.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 하면, 만약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와 징표들이 현세적 사고 방식과 타협하는 내용이었다면, 지금과 같은 반대가 없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따라 내려간다면 얼마나 쉬울까? 반대와 모함이 있다는 것은 성모님께서 가져오시는 것이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진리라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나주 성모님을 반대하는 분들이 무신론자도 아니고, 바로 성교회의 자녀들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현재 우리 교회의 구성원들의 믿음에 문제가 없는가? 과연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위탁하신 진리들을 희석시키거나 변질시킴없이 바로 수용하고 있는가?


만약 현재 가지고 있는 믿음의 내용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진리와 잘 부합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리고 나주에서의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성모님의 메시지와 징표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 속에 저항과 갈등을 느끼게 될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성체 성사에 대하여 교회의 가르침대로 믿지 못하고 있다면, 나주에서의 성체 성사 관련 메시지들과 기적들이 모순과 골치 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크리스챤의 길이 십자가의 길, 즉 사랑과 희생의 길이라는 것을 망각했다면, 율리아 자매가 보아 온 십자가 위에서 참혹하게 고통받으시고 피흘리시는 예수님, 성모상을 통하여 피눈물을 흘리시는 성모님, 그리고 율리아 자매의 거듭되는 고통들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 낙태를 찬성하고 있거나 과거의 낙태를 아직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성모님의 낙태 관련 메시지들, 그리고 율리아님이 받아온 낙태 보속 고통들을 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마음 속의 장벽이 너무나 높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근년에 와서 우리 나라 뿐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성체 신심과 성모 신심이 약화되고, 모든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신심도 잊혀지고, 고해 성사도 잘 보지 않고, 사제직과 수도 성소의 가치에 대한 인식도 희박해지고, 주일 의무도 등한시하고, 낙태를 비롯한 수많은 악에 대하여 강력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경향이 전개되어 오고 있는 실정이다.

주님께서 베푸시고, 교회 학자들이 설명해오고, 성인 성녀들이 실천해 온 영원한 진리가 우리들의 안일주의 때문에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주 성모님의 순수하고도 강력한 사랑과 진리의 메시지들에 대하여 갈등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닐까? 나주에서의 메시지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의거하여 변화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속적 사고 방식을 버리고, 가정의 평화를 회복하며, 기도와 사랑과 자아 포기와 봉헌의 삶으로써 성모님께서 이끄시는 영적 전투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통한 주님의 가르치심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과거에도 내려주셨고 또 지금도 나주를 통해 주시는 성모님의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쉽게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현대에 와서 특히 등한시되고 있는 성모님의 역할에 대한 진리들과 성체 성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다시 고찰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 인류 구원 역사에서 성모님의 필수적인 역할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성모님께서 필수적인 보조 역할을 하시도록 섭리하셨다. 그리하여, 먼저 천사를 통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동의를 구하시고, 마리아께서 동의하시자 곧 성령께서 임하시어 구세주가 강생하셨다. 성자께서는 성모님의 모태에서 성장하셨으며, 탄생하신 후에도 성모님의 사랑의 품 안에서 자라나셨다. 그리고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시기까지 약 30년을 성모님과 함께 생활하셨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후에도 성모님의 역할은 겉으로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으나 밀접하고도 필수적인 방법으로 당신의 아드님을 뒷받침하고 계셨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복음서에서도 그리스도의 공생활 동안의 성모님의 역할의 일부를 엿볼 수 있으니, 즉 가나에서의 혼인 잔치에서 우리들의 필요와 어려움을 자상히 살피시어 주님께 부탁드려주시는, 즉 은총의 중개자로서의 성모님의 역할을 보여주고 계시며 (요한 2장 1-11절), 십자가 밑에서는 당신의 아들과 함께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고통을 바치시는 보속의 협조자로서의 성모님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요한 19장 26-27절).

그리고 십자가 상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모든 크리스챤을 대표하는 요한 제자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주심으로써 성모님께서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시며 성교회의 모친이 되신다는 중요한 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다.


성모님의 이러한 역할이 성모님의 몽소 승천과 더불어 끝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교회를 통하여 특히 성체 성사를 통하여 우리와 계속 함께 계심과 같이, 성모님께서도 천국에서 영광을 누리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드님과 함께 항상 성교회를 어머니로서 돌보고 계시며, 온 인류가 회개하고 구원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참된 도리들을 베풀어주시고 혹독한 고통과 죽으심을 통하여 구원의 은총을 마련하시어 이를 당신 교회에 위탁하셨으나, 인간들이 이를 잘 깨닫지 못하고 거듭하여 오류에 빠져서 진리를 멀리하고 허황된 목표들을 향하여 가는 탓에, 성모님께서는 누차에 걸쳐서 인류 역사에 개입하시어 방황하는 당신의 불쌍한 자녀들을 불러모으고 계신다. 특히 16세기 멕시코의 과달루페에서 메시지와 징표를 

주셔서 천만 명 가까운 멕시코 주민 거의 모두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시고 해마다 수 만 명의 사람을 잡아 우상에게 제사 바치던 악한 풍습을 소멸시켜주셨다.


1830년에는 불란서의 빠리에서 카타리나 수녀를 통하여 메시지를 주시고 기적의 패를 만들도록 해주심으로써 인간들이 성모님께 의지하여 악에서 벗어나고 주님께로 갈 수 있도록 수많은 은총을 퍼부어주고 계신다. 그 밖에도 루르드, 파티마 등 여러 곳에서 인류가 영적인 태만과 잠에서 깨어나도록 계속하여 호소해오고 계신다. 1985년부터는 한국의 나주에서 지금까지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더 강력하게 메시지와 징표들을 내려주고 계심으로써 드디어 창세기와 묵시록에 예언된 여인과 마귀와의 전투가 과연 절정에 이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주성모님의 사랑의 메시지와 징표들의 소식은 전 세계에 전해지고 있으며,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깊은 감명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성모님의 원의를 실천하려고 진지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평소에 성체와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깊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2. 성체께로 우리를 이끄시는 나주 성모님

나주에서 성모님이 가장 강조하시는 내용이 바로 성체 성사 안에 참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우리가 알아차리고 또 이 엄청나게 중요한 도리를 모든 이들에게 바로 전하라고 하는 부탁이시다. 그런데 교회 안의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많은 평신도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일부 성직자들까지도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실존을 믿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교리들에 충실해야 하며, 교황님의 가르치심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따라야 한다. 그리고 교황님과 일치하는 모든 성직자들을 따라야 한다. 또 성인들의 가르침과 전기를 자주 읽고 묵상하여 우리의 생각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자주 점검해야 한다.

결국 나주 성모님께 관련한 찬반의 논의도 교회에 위탁된

주님의 진리, 즉 공적 계시 내용에 의하여 판결이 나야 된다. 어느 쪽이든 주님의 가르치심에 참으로 충실한 쪽이 진실된 쪽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공적인 판단은 해당지역의 주교님과 교황님의 권한 사항이며, 이러한 판단이 내려졌을 때에는 모든 신자들이 이에 순종해야 한다.

3. 징표의 역할과 중요성

나주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이 지적하는 한가지는 나주에 너무 기적이 많다는 점이다. 주님께서 무슨 TV Show에 출연하신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럴 수 있느냐고 한다.


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유대교 지도자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기적을 행하시기를 단호히 거절하셨다는 예로써 기적들 전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이와 결부하여 심지어는 율리아 자매가 기적들을 조작해내고 있다라는 비난까지 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근거없는 비난은 무고한 사람을 단지 의심과 짐작을 바탕으로 하여 하는 것으로서 책임있는 사람으로서는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다.


무고하게 남을 비난하거나 단죄하는 것은 십계명 중 제 8계명에 어긋나는 일이다. 기적 즉 징표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는 하느님께서 징표들을 쓰시는 목적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징표들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주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를 재미있게 해주시거나 자랑하시기 위한 것도 아니다.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은 떠나가서 사방에 복음을 선포하였는데,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며 표징들이 따르게 하심으로써 말씀을 굳건히 뒷받침 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르꼬 16장 20절). 사실 주님께서도 공생활 중에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는데, 그 목적은 당신의 가르치심이 진실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심이었다.


오늘날 세계에는 메시지를 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수 많은 이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참된 메시지와 거짓 메시지들을 구분할 수 있는가? 그 기준은 간단하다. 메시지 내용이 교회의 가르침과 부합되는가를 보아야 되고, 또 확실한 징표가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메시지와 함께 주어지는 징표들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도 "눈물도 중요하지만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 라고 하심으로 (1987년 10월 19일) 징표가 메시지의 참됨을 확인해주기 위해 주어지는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것임을 알려주셨다.


즉 메시지를 통하여 성모님께서는 주님께서 이미 주신 가르치심들을 모성적인 자상함과 사랑으로 자세히 설명해주셨

고, 또 당신의 티없으신 성심이 왜 그렇게 슬프신지도 알려주셨다. 그리고 눈물과 피눈물이라는 징표로써 그 메시지를 뒷받침하셨다. 또그 다음에는 향유를 흘려주심으로써, 당신의 자녀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우정, 그리고 당신의 현존을 재확인하여 주셨다.


그리고 지금까지 거듭하여 보여주시는 성체 기적들은 이 기적들을 통하여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 대기적은 미사 때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할 때마다 일어나고 있다.


전 세계의 성당들에서 매일 끊임없이 그 놀라운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단지 우리가 육안으로서 그 변화를 볼 수 없을 뿐이다. 이러한 사랑의 신비를 우리가 더 확실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하여 그 신비의 내용을 외적으로도 보여 주시는 것이 나주에서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성체 기적들이다. 즉, 이 성체 기적들이 성체 성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치심을 보조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기적의 의미이다. 진리를 우리가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 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중한 역할인가? 그런데 우리가 여러 가지 헛된 말로써 징표들을 멸시하고 징표를 주시는 주님의 뜻을 망각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주에서의 성체 기적들 중 일부는 성체가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체가 나주의 경당 안에서 위로부터 강림하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마 율리아 자매가 호주머니에서 면병을 꺼내놓은 것일 것이라는등 억측을 하는 이들도 있다. 당시에 경당 안에 있었던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런 가능성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성체가 위에서 내려오시는 장면이 비디오에 찍힌 경우도 있기 때문에 율리아 씨나 다른 분들이 개입되지 않았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도, 위에서 내려온 것이 성체인지 면병인지 알 수가 없다는 의견들이 나오기도 했다. 사제의 축성을 받았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1995년 7월 1일 일곱 개의 성체가 내려 왔을 때 대주교님의 명에 의하여 성체를 영하게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율리아 자매가 영한 성체가 살과 피의 형태로 변하였다. 그 피의 일부를 프란시스 수 신부님과 피트 마르시알 신부님께서 손가락으로 찍으셔서 흰 수건에 닦으셨는데, 이 수건에 묻은 피가 나중에 서울 대학교 법의학과 실험실에서의 DNA검사 결과 사람의 피라는 판명이 나왔다.


그리고, 나주에 내려오신 성체가 어떤 성당에서 천사에 의해 옮겨진 것일 수도 있고, 또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인지도 모른다. 성체는 천사들의 양식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1917년 파티마에서 성 미카엘 대 천사가 성체를 모셔와서 아이들에게 영해준 전례도 있다. 성체란 바로 살아계신 예수님이시므로, 그분께서 어떤 형태로 언제 어디에 임하시든 이는 그분의 뜻에 달린 것이지, 우리가 "주님, 그렇게 오시면 안됩니다." 라고 막을 권리는 없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나주의 성체 기적들이 고위 성직자들이나 신부님들 앞에서 일어났던 점을 들어서 율리아가 원하는 때마다 기적이 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고 있다.

그러면, 1531년에 과달루페의 징표가 당시 그 지방의 교회 최고 장상이셨던 추마라가 주교님 앞에서 주어졌던 사실도 이상하다고 보아야 하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성의가 아니라, 완 디에고의 개인적인 의도였을 것이라고 의심해야 하는가? 구약 시대에 하느님의 기적이 모세를 통하여 거듭하여 이집트 왕 파라오 앞에서 일어났던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징표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고 중요한 성체 기적이 성교회를 대표하시는 분들 앞에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거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바로 교회의 중요성, 그리고 성체 축성권과 사죄권 및 교도권을 위임받아 계시는 성직자들의 중요성을 주님께서 강조해주시는 것이며, 또 주님께서 교회 안에서 성체 성사를 더욱 중요시하고 또 이를 가르치라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명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는 현실을 부정하고 내세만을 강조한다는 비난도 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더라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현세를 나쁘게 보는가라고 하는 주장이다. 나주에서의 메시지 전반에 걸쳐서 세상에 창궐하는 죄악과 불신이 탄식되고 있고 회개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어째서 이것이 현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는가?


주님께서 죄인들과 가까이 하신 것은 죄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지, 그들의 죄를 용납하셔서가 아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죄 중에 잡혀와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으리니, 가서 이제는 더 죄를 짓지 말라." 고 하셨다 (요한 8장 11절). 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일 너희가 세상에 속해 있다면 세상은 자기 사람이라고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했으니 바로 그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요한 15장 19절)


무한한 선이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좋다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과거에 현 세상을 악한 것으로 보고 우리의 육신도 나쁜 것으로 보는 이단도 있었으나, 교회의 가르침은 이와는 다르다. 

그러면, 현세와 물질과 육신을 우상화하는 현대의 사상들과 교회의 가르침과는 유사한 것인가? 그렇지도 않다. 교회의 자녀들은 현세를 하나의 독립된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영원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본다. 영원과 비교할 때 우리의 현세는 너무나 짧고 제한이 많다. 그래서 이 현세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때 그것은 너무나 허망되고 비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는 현세안의 매순간의 가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증가한다. 왜냐 하면, 우리는 현세안에서의 삶을 통하여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사랑과 행복의 열매를 엮을 수도 있고, 영원히 지속되는 불행의 씨앗을 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현세에서의 단 한 순간도 낭비하거나 잘못 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 나주에 대하여 현세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어색한 비난이 나오고 있는 것일까?

이는 아마도 현대에 와서 교회 안에까지 현세 중심적인 사상이 침투해서일 것으로 본다. 주님께서 펴신 가르치심의 중심이 마치 이 현세를 어떻게 잘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인양 설명하려는 풍조가 있는 것 같다. 물론 교회는 현세의 문제들에 대해 외면하지 않는다. 역사상 가톨릭 교회만큼 교육과 병원 기타 복지사업을 해온 종교나 단체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배고픈 자들을 먹여주셨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고 물질을 필요로하는 이상 교회의 박애 사업은 항상 계속될 것이고 또 힘껏 지원되고 참여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외적인 선행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마르따와 그의 아우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마르따는 주님께 마리아를 책망하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마리아가 더 나은 쪽을 선택했다." 라고 말씀하였다 (루까 10장 38-42절). 성 바오로 사도께서도 "사랑이 없는 자선 행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라고 하셨다 (고린토 전서 13장 3절).


테레사 수녀 같은 분도 그처럼 사랑과 자비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그 밑바탕에는 깊은 내적인 신심 생활, 즉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 또 성모님과의 밀접한 일치가 있었다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체 조배를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관상 수도 생활을 현실 도피라고 비난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진수를 모르는 데에서 유래된 착오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5. 작고 가난한 길로 오시는 주님

2천년 전 구세주께서는 베들레헴의 누추한 마굿간에서 탄생하셨다. 성모님께서도 마찬 가지로 나주라고 하는 작은 곳에서 평범한 한 가정을 택하시어 지금까지 엄청난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주어 오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비천함에 싸여 계신 주님의 고귀한 손길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손길에 담겨진 주님의 깊은 사랑과 자비의 뜻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도 작고 가난해져야 한다. 그래서 하루 속히 나주를 통하여 뻗쳐주시는 성모님의 손을 잡고 성교회를 활성화하며 세상을 교화하는 일에 모두들 발 벗고 나서야 한다.


진리의 빛이 오류의 암흑을 몰아내고, 교회를 통한 은총의 강물이 힘차게 흘러서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나라와 자연적인 인간 세계가 성모님을 통하여 다시 한데 묶여져야 한다. 왜냐 하면, 우리의 영원한 목적은 이 세속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그 어느 것도 아니며, 오직 완전한 선이시고 사랑이신 하느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1997년 9월

Mary's Touch By Mail

이상민(분도)

2017. 12. 25. 아기 예수님의 황금향유
2017. 12. 25. 아기 예수님의 황금향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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