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성모님의 진실

공지문의 문제점들

가톨릭 신앙의 보물들

가톨릭 신앙의 핵심

특수계시의 분별

 

 

1. 만일 누구든지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참으로, 실제(實際)로, 그리고 실체적(實體的)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분의 영혼과 천주성과 함께 계시며, 따라서 그리스도 전체가 계심을 부정하고, 단지 그분께서 그 성사 안에 징표로서, 상징으로서 또는 능력으로서만 계신다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1)

 

 

2. 만일 누구든지 신성하고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實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남아 있다라고 말하며, 빵과 포도주의 외양만 그대로 남아 있고 빵의 실체 전부가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피로 변하는 이 훌륭하고도 유일무이한 변화, 즉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적합하게 실체변화라고 부르는 이 변화를 부인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2)

 

 

3. 만일 누구든지 존경받아 마땅한 성체성사에 있어서 (빵과 포도주의) 어느 한 쪽의 형상 하에서도 그리고 그로부터 분리된 각 부분에도 그리스도의 전체가 내재하심을 부정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3)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정원경 자매님의 글을 읽고 (1)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정원경 자매님의 글을 읽고 (2)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정원경 자매님의 글을 읽고 (3)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정원경 자매님의 글을 읽고 (4)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방인권 형제님의 글을 읽고 (1)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방인권 형제님의 글을 읽고 (2)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자유의 빛"님의 글을 읽고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김 베드루 씨의 글을 읽고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베드루 씨의 글들에 대하여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박철순 형제님의 질문에 대하여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강경식 형제님의 글들을 읽고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Peter 형제님의 글들에 대한 답변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정원경님의 글을 읽고 (1)

 

찬미 예수

친애하는 정 원경 자매님께,
주님의 거룩하신 수난과 부활을 기리는 성주간을 맞이하여 자매님과 고국에 계신 모든 형제 자매님들께 주님의 축복과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성 바오로 선교 넷트에 올리신 나주 관련 글에 대하여 몇 가지 의견을 나누고저 합니다. 나주에서의 일들에 관하여 현재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과연 그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하느님께서 메시지나 징표들을 보내실 때 이를 받는 입장에 있는 교회와 신자들의 임무는 올바른 분별을 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의 진위성은 인간적인 판단이나 견해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계시 진리를 오류없이 가르치는 것이며, 신자들의 의무는 그 진리의 가르침에 의거한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 역사(役事)에 있어서 진리는 가장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사항입니다.  그런 탓에 주님께서는 신자들의 총체(總體)가 믿음의 오류를 범할 수 없도록 보호하여 주시는 것이며 (가톨릭 교회 교리서, #92 참조), 또 신자들은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치심에 항상 충실하도록 스스로의 노력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지금 교회 안의 많은 문제들이 우리가 계시 진리를 등한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나주 관련 사항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그냥 대강의 짐작이나 속단을 하지 말고 교회의 가르치심과 사실에 의거하여 바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진리와 사실에 부합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판단도 바르지 못할 것이며, 또 이에 따라 다른 이들도 잘못 이끌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광주 대교구의 나주 관련 공지문에 대한 국내외의 논평들을 모은 "진리와 교도권의 수호를 위하여"라는 책자가 나와 있습니다.  모쪼록 자매님께서 그 책을 읽어보시도록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책 안에서 설명되어 있듯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광주 대주교님의 교도권 자체가 아닙니다.  대주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시요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관할 교구 안에서 확실한 교도권과 사목권을 가지고 계시며, 따라서 신자들은 대주교님을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존경과 사랑으로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공지문 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나주의 성체 기적들에 관한 판단이 교리의 잘못된 해석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로부터의 진리에 의거해서 판단하셔야 할 대교구에서 교리 상의 오류에 근거하여 판단과 사목 지침을 내리셨다면, 이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매우 깊은 사려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더 자세한 것은 위에 말씀드린 책자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공지문에서 나주의 일들이 참된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증명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교회에서는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 동기는 우리가 진리들을 반드시 우리의 지성으로 증명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4 참조).  우리가 어떻게 삼위 일체 도리를 증명할 수 있으며, 천주 성자의 강생 도리, 주님의 부활 도리, 성체 도리, 성모님의 무염 시태 도리, 몽소 승천 도리 등을 인간의 머리로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계시에 대하여 우리가 증명할 수 없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교회가 이미 단죄한 현대주의와 합리주의(rationalism)의 영향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광주 대교구의 나주 관련 공지문이 발표되었을 때, 일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께서는 그 결정이 교황청과의 충분한 의논과 합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사실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광주 대교구에서 공지문을 발표하시기 전에 교황청에 보고드린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주에 관한 부정적인 결정은 교황청의 뜻이 아니라, 광주 대교구의 뜻이었습니다.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에 대하여 교황님께서 반대의 뜻을 발표하지 않으셨다고 하셨는데, 교황님께서 지방 주교님들의 발표에 동의하지 않으신다고 하여 금방 반대의 뜻을 공표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광주 대주교님의 발표는 교회의 공적인 교도권의 행사였으며, 이를 공적으로 시정하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매우 신중한 절차들을 통해서만 될 수 있는 일입니다.  교황님께서 금방 반대의 뜻을 발표하지 않으셨다고 하여 교황님께서 그에 동의하시거나 묵인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희는 교황청에서 나주의 사정에 대하여 매우 상세히 알고 계시며 광주 공지문 상의 문제점들 및 한국 교회 내의 몇 가지 문제점들에 대하여 심각하게 염려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뿐 아니라, 1995년 9월에는 교황 성하께서 친히 성하의 개인 비서이신 투 몬시뇰을 나주로 보내시어, 성하께서는 나주의 사정에 대하여 잘 알고 계시며, 나주 성모님을 무척 존경하시며, 또 율리아 자매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전해오셨습니다.  그리고, 나주의 일들을 인준하고 싶으시지만, 교구 주교님과의 일치를 위하여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도 전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의 분열을 원치 않으시는 교황님의 뜻을 헤아리고, 교회 안의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는 모든 오류들이 시급히 시정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기도드려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성직자들과 수도자들, 평신자들이 애덕과 신앙 안에서 일치하여 우리들 마음 속에 존재하는, 진실과 사랑이 아닌 모든 것을 몰아내어야 하겠습니다.

덧붙여서, 이 제민 신부님의 "녹지 않는 소금" 책자를 권장하셨는데, 물론 여러 의견들을 두루 살피는 것은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신부님의 글들을 읽을 때, 교황청에서 이미 두 차례에 걸쳐서 한국 주교 회의를 통하여 이 신부님의 신학 사상들에 대해 정식으로 경고하셨음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이 신부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앞으로 훌륭한 성인 신부님이 되셔서 신자들을 이끌어주실 것을 희망합니다.  그러나, 어느 신부님께서든 만약 교회의 정통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상을 가르치신다면, 신자들은 이를 그대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그 신부님께 의논드리고, 그래도 안되면 주교님께 청원드려서 시정을 추구해야할 것입니다.  우리 양들은 목자들께서 오류와 타협된 듣기 편한 가르침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참된 진리만을 전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중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견되지만, 그 일례를 들면, 나주에서 고위 성직자들께서 방문오시는 날 미리 비디오 카메라를 준비해놓고 성체 기적을 조작하여 이를 찍었다라고 비난을 하셨는데, 아마 많은 신자들이 이를 듣고 그대로 믿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성직자들께서는 말씀하실 때 진리와 사실에 어긋나는 말을 퍼뜨려서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셔야 된다고 봅니다.  나주의 경당에는 천정 양쪽에 두 대의 비디오가 항상 장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회라든가 중요한 손님이 오셨을 때에는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무조건 비디오를 작동시킵니다.  그런데 비디오에 성체 기적의 장면들이 잡힌 것을 보고, 미리 기적을 조작해놓은 것이 틀림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너무나 경솔한 억측입니다.  신자들이 존경하는 성직자께서 짐작과 상상으로 근거없는 말씀을 퍼뜨리시니 영문도 모르고 이를 그대로 믿게 되는 신자들이 딱할 뿐입니다.

나주에서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주신 순수한 신앙의 유산에 다시 충실할 것을 애타게 촉구하고 계십니다. 2천년 전에 주님께서 수많은 징표들을 행하시며 진리를 가르치셨지만, 이를 직접 보고 듣고서도 끝까지 배척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냉혹한 마음가짐을 배우지 말고, 어머니를 사랑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어머니의 말씀을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어린 아이처럼 주님과 성모님의 말씀과 징표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 분도 드림
Gresham, Oregon, U. S. A.
1999년 3월 28일, 성지 주일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정원경님의 글을 읽고 (2)

 

찬미 예수

친애하는 정 원경 자매님께,

안녕하신지요? 인터넷에 새로 올리신 글에 대해 답을 드립니다. 우리의 공동 목표는 주님의 진리와 사실에 충실하는 것이며, 우리들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토론을 한다면, 다 함께 진리와 진실에 도달하여 모두가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진리를 배우고 생활하기 위하여 교회의 구성원이 된 우리들에게는 오직 그 길만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라고 봅니다.

먼저 이번에 올리신 글에는 이해가 어려운 부분들이 있으므로 먼저 말씀드립니다. 저의 글의 출처에 대해 궁금하다는 말씀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나주 홈페이지에서 퍼왔는가 하는 말씀은 무슨 뜻인지요? 제가 쓴 글 몇 가지가 나주 홈페이지에 올라가 있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쓴 글의 일부를 제가 되풀이했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요?

그리고 이 제민 신부님의 신학 사상에 문제가 있다라고 하는 것은 제가 먼저 꺼낸 말이 아니고 교황청에서 공식적인 통로를 거쳐서 하신 말씀입니다. 저도 교회 신문을 통한 발표가 있고 난 후에 이 신부님의 글들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으며,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의 사견이고 중요한 것은 교도권을 가진 교회 당국의 판단입니다.

한국어를 모르시는 교황청에서 어떻게 이 신부님의 글을 평가하실 수 있겠느냐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전 세계의 교회를 책임지고 계시는 교황청에서 언어 장벽 때문에 그 책임을 바로 수행하실 수 없으시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언어 장벽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교황청에서 하실 일이므로, 우리는 그런 이유로 교황청의 교도권 행사를 신뢰하지 못한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주 일과 관련하여 교도권에 순명하겠다고 하셨는데, 교도권에 대한 순명은 모든 신자들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교도권을 무시하고 각자의 개인적인 판단만 고집한다면 정상적인 가톨릭 신자 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그래서 신자들은 본당의 신부님들께 사랑으로 순명하며, 그 위에 교구장 주교님께 순종하고, 또 그 위에 교황 성하와 성하를 보좌하는 성성들에 순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 교도권은 인간의 권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신적인 권위이며, 가톨릭 교회 안에서 진리의 순수성과 일치를 유지해나가는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기둥과 같은 사항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본당이나 교구 차원에서의 순명만 생각하고 교황청에 대한 순명은 소홀히 한다면 이 또한 모순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씀하신 여성 사제직에 대해서 그 동안 논란이 있어왔지만, 교황청에서는 거듭 반대의 의사를 표명하셨고, 근년에는 교황님께서 확정적으로 여성 사제직은 안된다고 못박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계속 찬성한다면 이는 교황청의 교도권에 대한 불순명이 될 것입니다. 사제 독신제도 마찬가지이며, 또 교회론, 성체 성사에 관한 교리, 성모님께 관한 교리, 교황님과 공의회의 무류지권에 관한 교리 등에 대해서도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치심에서 벗어나는 많은 논란들이 있어 왔는데 이 또한 교도권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주에 관한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에 관해서도 교도권 행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도권 행사 과정에 있어서 교황청에 통보만 했지 교황님의 희망과 의견이 고려되지 않음으로써 교황청과의 일치가 결여되었고, 나주의 징표들을 직접 경험하시고 증언하신 국내외의 여러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의 의견도 무시됨으로써 전체 교회 안의 친교가 결여되었으며, 또한 나주에 대한 부정적 판단의 주요 근거로 인용된 공지문 상의 교리 설명이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치심에 부합되지도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주교님들과 신부님들께서 신자들을 가르치고 사목하시는 데에 성령의 특별하신 도우심이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동시에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의 자유 의지 또한 항상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분들도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치심에 충실하고 전체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려는 많은 노력을 경주(傾注)하심으로써만 진리 안에 확고하게 머무르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적 계시에 대한 공적인 조사와 분별이 일차적으로 관할 교구에 맡겨져 있지만, 그것이 교황청의 권한밖에 있는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권한인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주교들의 권한은 교황의 지도 아래 전체 교회의 친교 안에서 행사되어야 한다,"라고 가르치십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895조)

이 제민 신부님께서 "공동선" 잡지 1998년 5월 호에 내신 "가톨릭 교회는 가톨릭적인가"라는 글에서 교황청의 거듭되는 경고에 대해 심히 반발하시며, 교황청은 한국어에 대한 문맹이라고 혹평을하시고, 그러나 교황청의 경고 대상이 되었던 문제의 사상들을 그대로 되풀이하셨습니다. 나주의일들을 막기 위하여 교도권에 대한 순명을 그토록 강조하시면서, 막상 교회 내의 최고의 교도권에 대해서는 그 교도권 자체를 부정하면서 반발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결국 한국 교회의 일부 구성원들이 탈 로마화된 한국만의 교회를 원하는 것인지 심히 염려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12 사도를 선택하시고 그 중에서도 베드로를 으뜸으로 삼으셔서 교회 안에 볼 수 있는 최종적인 교도권의 보유자로 세워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인 교황님들은 가톨릭 교회의 반석입니다. 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가톨릭 신자로서의 기본 의무입니다. 지방 교회의 문화적 특성은 신앙의 순수성과 예절의 일치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살려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지방 교회들은 교황님을 중심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정통 교리들에 절대적으로 충실해야 하며, 교황님을 정점으로 한 교도권에 순종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 나주에 관하여 찬반의 이론(異論)이 일고 있는 것은 가톨릭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들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기본적인 사항들이란 다름아닌 교회의 정통 가르침들과 교황님을 정점으로 한 교회의 교도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신앙을 활성화하고 세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복음화하기 위하여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옥같은 가르치심들이 그 동안 현대주의 사상에 물든 분들에 의하여 아전인수 격으로 잘못 해석되고 잘못 적용되어 수많은 폐단들이 발생했습니다. 마치 지금까지 가르쳐져 왔던 교리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듯이, 더 이상 가톨릭 신앙의 중심이 아닌 듯이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모든 교리들이 시대에 맞게 그 내용이 변하고 발전되어야 한다는 진화론적인 사상이 유포되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가톨릭 교회를 통하여 절대적인 계시 진리가 가르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시되어 왔으며, 가톨릭 신앙 생활의 기본적인 사항인 교리들이 빛을 잃어 왔습니다. 마치 교회가 한 시대와 지역 공동체 안의 현세적인 문제들을 주로 해결해야 하는 단체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모든 초자연적인 내용들이 신화적 또는 부수적인 사항들인 것 처럼 뒤로 밀려버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초자연적인 본성과 자연적인 본성을 함께 가지고 계시는 분이시므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안의 삶에도 초자연적인 현실과 자연적인 현실이 함께 작용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데도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70조-776조 참조), 근년에 와서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 신앙의 초자연적인 차원을 망각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왔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진리가 가려지고 혼탁해진 분위기 안에서 나주에서와 같은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초자연적인 말씀들과 징표들이 바로 이해되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실이라고 보여집니다. 현재 교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현 상태에서 즉 주님의 계시 진리로 확고히 돌아오지 못하고,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주의 메시지와 징표를 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지금 나주의 일들만 가지고 논하기보다는 교회의 정통 가르침과 교회의 교도권에 진정으로 승복하고 따를 자세가 되어 있는가를 먼저 점검을 한 후에 그 점에 대한 일치가 있다면 나주에 관한 모든 의문점들과 의심들이 저절로 해결될 것으로 봅니다.

우리가 교회 안의 진리와 교도권이라는 객관적인 척도에 의하지 않고, 개인적인 판단을 토대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면, 이는 개신교적인 사상은 될 수 있을 지 몰라도 가톨릭적인 사상은 아닙니다. 지금 가톨릭 교회 안에 주님의 가르치심이 얼마나 경시되고 있는지, 교회의 정통 가르치심 대신 얼마나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의견과 주장들이 자리잡고 있는지 심히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물론 신자들이 로봇처럼 교회의 교리들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참된 가톨릭 신앙은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대한 사랑에 찬 순종과 개인의 자유로운 양심의 판단이 아름답게 합치되고 조화됨 속에서 진리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강요되지 않으며, 사랑과 겸손, 자아 포기 속에서 아름다운 한 포기의 꽃나무처럼 자연스럽게 자라고 피어나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이나, 성인들이나, 우리들 모두 인간이다라는 말씀, 그리고 성모님을 신으로 보는 것은 아니냐라는 말씀을 보고, 슬픈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구세주의 강생은 참 하느님이신 천주 성자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본성과 자연적인 인간의 본성이 합해짐을 뜻했습니다. 인간이 되시면서 신성을 그대로 가지고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인격은 천주 성자 한 분이시지만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지고 계시므로 참으로 하느님이시고 참으로 인간이십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현실과 자연적인 현실의 만남과 합치는 크리스챤 신앙의 핵심 사항입니다.

그리고 구세주께서는 당신의 수난으로 인류를 구원해내셨으며, 당신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던 초자연적인 생명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즉 자연적인 차원에만 있던 인간들을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세계로 들어올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삶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대체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에 초자연적인 생명을 주입시킴으로써 자연적인 것을 성화시키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 성인들 모두 하느님이 아닌 인간이시지만, 사랑과 겸손으로 하느님의 뜻에 합치되심으로써 하느님의 은총 즉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생명에 의하여 들어올려지고 성화되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주에 오신 성모님의 인간적인 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는 성삼위 하느님께 지극히 가까이 일치되어 계시며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명하여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말씀과 징표와 사랑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성모님도 인간이시므로 그분의 말씀과 활동이 나의 신앙 생활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고 하는 생각은 이해되기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님이시며, 교회의 어머님이시며, 우리들의 어머님이신 성모님의 오심과 말씀을 우리가 외면한다면 그분을 우리에게 보내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주의 일들이 교회 안의 일치를 해치고 있으므로 참된 것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복음서에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화평이 아니라 칼을 주기 위하여 왔다라는 표현까지 쓰시면서 (마태오 10:34), 일치를 위한 일치, 진리를 양보하여 얻어지는 일치를 배격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오류와 타협하셨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으셔도 좋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순교 선열들이 타협했다면 피를 흘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주에서의 메시지들과 징표들은 하느님의 크신 축복입니다. 그 축복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의 가르치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지 살펴보고 타협되지 않은 순수한 주님의 진리에로 복귀할 수 있어야 겠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주님의 진리와 사랑의 빛을 밝게 비추고 전하는 귀한 사명을 수행하는 복된 민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축복을 빌며,

이 분도 드림
Gresham, Oregon, U. S. A., 1999년 4월 9일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정원경님의 글을 읽고 (3)

 

김학자(루시아)

자매님께서 분도 형제님께 쓰신 글에 저에 대한 내용도 있기에 그에 대한 답변과 더불어 저의 생각을 적겠습니다. 자매님의 글이 정말 갈수록 부드러워 지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합니다.

1. 저의 글의 출처를 물어보셨습니까? 제가 인용한 글에 대해서는 모두 출처를 밝혀 놓았습니다. 나주 홈페이지에서 그대로 퍼온 글은, 확인해보면 아시겠지만 없습니다. 출처가 있는데도 근거를 대라시니, 대체 그 근거란 무엇입니까? 제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경위를 물어보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저의 글 모두가 그 근거이지요.

2. 객관적 근거란 무엇이고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지금 나주에 대해, 신자들은 이단시하는 분도 있고 참된 발현이라 믿는 분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는 이 양끝 아니면 이 둘 중간의 어딘가에 있습니다. 나주 성모님에 대해 책을 쓰고 싸이트를 만들고 토론하는 일들은 양 끝에 계신 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나름대로의 확신과 목적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모 아니면 도입니다. 어정쩡하게 이럴 것도 같고 저럴 것도 같은 사람이 싸이트를 개설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그런 싸이트가 있더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믿는 쪽이다"라고 판단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객관적 자료라고 인정하실만한 자료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제3자-비신자가 보는 나주나, 해외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눈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실까요? 이것은 '은총은 강물처럼' 싸이트에서 본 내용인데 경당과 성당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월간조선의 기자분도 나주에 취재갔던 일과 더불어 견해를 밝힌바 있습니다. 아마 자매님도 읽어 보셨을 겁니다.

정말로 객관적 자료가 있다면 저 역시 보고 싶습니다. 어디서 찾아야 하죠?

3. 이제민 신부님에 대해서 어떤 분이 존경한다고 하신 그 어떤 분이 저인가요? 그렇게 쓴 적은 없지만, 저는 이제민 신부님을 존경합니다. 그분 뿐 아니라 모든 신부님들은 존경받으셔야죠. 하지만 신부님을 존경하는 것과 신부님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과는 엄연히 별개입니다. 저는 이신부님의 글의 신학적 오류에 대해서는 쓴 바 없습니다.

4. 한국 가톨릭이 갈라지는데 대해 걱정을 하시는데, 의견이 갈라진 건 공지문 이후부터입니다. 분열의 원인은 공지문이지 나주 성모님이나 율리아 자매님이 아닙니다. 설마, 왜 발현하셔가지고… 이런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자매님께서 교도권에 순명하는 것이 나주 성모님과 자매님 신앙이 별 관계가 없기 때문이었군요. 그것은 자매님이 밝히셨듯 순명하는 이유이지, 나주를 이단시하고 율리아 자매님을 존칭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으로 몰아갈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나주 성모님과 신앙에 상관이 아주 많은 사람도 많답니다.

저희 본당 얘기를 해 드릴까요?
저희 교구는 전에 계시던 주교님께서 많은 것을 금하셨답니다. 다른 교구에서 좀 비웃을 정도로, 하지 말라면 안하고 말 잘듣는 신자들입니다. 원래 태백 산맥 안쪽의 영서지방 사람들은 성격이 드세지를 못합니다. 성령 세미나조차도 하지 말라고 하셔서 쥐죽은 듯 안하고 지냈습니다. 거기다 제가 다니는 성당의 주임 신부님은 어찌나 성격이 터프하고 꼼꼼하신지, 본당 모든 일은 다 주임신부님을 거쳐야 합니다. 바로 전에 계시던 신부님과 대조적이죠. 미사시간에 주일학교 애들이 좀 떠들라치면 경문 외우시다가도 소리를 빽 지르시는, 그런 호랑이 신부닙이십니다.

이런 신부님이 나주에 가지 마시오! 하시니, 그전까지 버스로 몇대씩 대절해서 가던 나주 순례가 딱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글쎄, 우리의 순박한 아주머니들은 전화로 연락을 해서 밤에 몰래 나주에 내려갔다 오시곤 합니다. 그러다, 신부님이 가지 말라는 나주에 갔다왔다고 고백성사를 보는 아주머니도 계시고, 그러자 신부님은 노발대발하셔서 가지 말라그랬잖느냐고 강론시간에 화를 내시고, 그러니 아주머니들은 더욱 조용히 내려가시고…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평화롭던(?) 저희 본당에 이런 일이 왜 일어납니까? 신자들은 혼란스러운 겁니다. 교도권이 있는 것이 행복인 가톨릭에서 그 교도권이 따를만한 것이냐를 논하는 것은 신자된 입장에서 차마 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앞으로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몰래 내려가시는 자매님들도 그렇겠죠.

제가 나주에 관해서 문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1) 공지문의 오류
공지문에 오류가 있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공지문 뿐 아니라 나주 조사위원의 한 분이셨던 리순성 신부님께서 나주의 성체변화에 관해 쓰신 논문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성직자들이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면 양떼는 잘못된 길로 갈 것이고, 이는 큰 문제입니다.

2) 조사 과정에서의 문제점
어디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외국 어느 교구에서는 성모님 발현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2000명의 증인들을 인터뷰하고도 아직 조사가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주는 14명의 증인만 인터뷰했을 뿐이고 현장조사도 단 한 번 했습니다. 과연 성의 있는 조사였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물론 나주의 기적현상들이 가톨릭 교리에 위배된다면 조사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밝혔듯 교리에 위배된다는 그 내용이 오히려 정통교리에 위배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3) 의견수렴의 부족
일단 조사과정에서는 조사위 신부님들보다 나주에 대해 더 잘 알고 계시는 신부님들과의 의견 조율이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경청이라도 했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은 없었습니다. 또한 공지문 발표 후에는, 이렇게 논란이 많다면 공개적인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인터넷이라면, 증인과의 인터뷰 내용도 올라가 있고, 공지문에 대한 의문사항을 묻고 답하는 내용도 있고, 그래서 사람들이 나주에 관해 올바로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내적 일치를 위해 이로운 일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조사위의 체면이 깎이고 가톨릭적이 아닌 일이 되는 걸까요?

성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성'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뭔가 부끄럽고 떳떳치 못한 생각이 들게 하는 것처럼, 나주도 아무것도 모르게 한다면 부정적인 소문만 더욱 나돌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반 신자들이 '나주'를 들었을 때 뭔가 위험하고, 뭔가 이단스럽고, 뭔가 음침하고 뭔가 불경스러운 느낌이 들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것은 현실입니다. 근거도 없는 소문으로 율리아 자매님을, 나주를 사랑하는 사람을 매도하는 것은 이들의 영적 생명을 죽이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나주의 가장 중요한 것은 결실이라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하고 냉담자들이 돌아오며 신심이 더욱 깊어진 사례가 많습니다. 예수님보다 성모님을 더 떠받들고 율리아 자매님을 추앙하는 부작용이 생기면 문제겠지만, 아직까지 그런 일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정원경 자매님 말씀대로, 한국 교회의 일치와 신자들의 신심 도모를 위해서라도, 나주는 다시 조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정원경 자매님께 (4)

 

정원경 자매님의 5번째 글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나주 사건과 관련된 책이나 윤 율리아가 말한 것을 모은 책을 한 번이라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단, 미리 '성모님의 말씀이다'라고 전제하고 읽으시면 위험하겠더군요. 객관적인 마음자세를 가지고 한 번 읽어보십시오. 왜 문제가 되는지... 그리고 나주에서 있었던 일들이 왜 침묵하도록 명 받았는지...

나주에서 발현하신 성모님 말씀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정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라

하느님께서는 가정이 인류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인 공동체가 되도록 섭리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어 그들이 가정을 이루고 번영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의 생활 거의 전부를 성가정 안에서 지내심으로써 인간의 가정을 성화(聖化)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가정이 건전하며 사랑과 화목 가운데 일치를 이루기 바라십니다. 그래서 좋은 가정을 이루려고 애쓰는 모든 이들에게 특별히 강복하여 주십니다.

반면, 악마는 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가정들을 파괴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분노, 폭력, 물욕, 불성실, 불신, 낙태 및 비자연적인 산아 제한, 아동 학대, 음란 출판물 및 비디오, 지나친 여성 해방 주의, 개인 중심주의, 동성 연애 등을 조장하여 가족들이 서로 반목하고 불화하게 하고 서로에게 실망하게 하고 또 가정의 중요성을 망각하게끔 유도합니다. 우리들 세계의 미래는 우리들 가정에 달려 있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나주에서 성모님께서 메시지를 처음 주시던 날 가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들이 행복하기를 원한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너희들을 짝지워 주었건만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내 아들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고 있다. 서로 서로 사랑하여라. 가장 가까운 이웃이 누구냐? 가정 안에서의 사랑도 못하면서 어찌 나를 사랑한다고 하며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여 가정 성화를 아루도록 하여라. 바로 그것이 내 아들 예수가 갈급하게 원하는 것이다. (85. 7. 18)

* 이 세상의 죄악이 점점 커져가고 있는 지금 암흑이 덮쳐 오고 있다. 많은 가정이 병들어 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평화가 있을 수가 없다. 서로 서로 행복하게 살라고 짝지워 준 부부들이 서로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함으로써 고립된 인간으로 되어가고 있다. (87. 3. 13)

2. 낙태를 중지하여라

나주에서 메시지를 처음 주시던 날 성모님께서 또 한 가지 강조하신 것은 낙태의 중지입니다. 그 후에도 성모님께서는 이 말씀을 누차에 걸쳐서 되풀이하셔서 낙태가 살인임을 우리가 똑바로 깨닫기를 재촉하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낙태에 관해 말씀하실 때, "무절제한 산아 제한"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습니다. 보통 "낙태"라고 하면, 수술을 통하여 태아를 죽이고 제거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계에 의하면, 전체 낙태 수의 10-15%만이 수술로 이루어지며, 나머지 85-90%는 약품 등의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특히 수태 초기에 행해지고 있다고 합니다(미국 및 캐나다에서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조직된 약사들의 단체 책임자인 보고미르 쿠하르 씨의 연구 발표문, 가톨릭 통찰(Catholic Insight) 월간지, 1996년 5월호에 보도).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잉태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태아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임신의 진행을 막기 위해 취해지는 그 어떠한 조치든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낙태라고 하는 이 엄청난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할 것을 우리 모두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낙태라는 이 악 뒤에는 죽음의 천사, 곧 마귀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리아 자매는 낙태하는 이들의 죄악을 보속하기 위하여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 무절제한 산아제한으로 나의 가슴은 몹시 아프다. 낙태수술을 막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여라.(85. 7. 18)

* 지금도 낙태 수술을 하므로 내 배가 찢어지도록 아프다. 묵주 신공을 더 열심히 바쳐다오. (88 1. 30)

* 무자비하게 살인을 하면서도 살인자라는 것을 모르기에 불쌍하게도 지옥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 당하고 부모가 받아야 할 크나 큰 형벌을 어린 생명들이 받아야만 하다니. 이건 너무나 혹독한 형벌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죄없는 어린 생명,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생명을 무참히도 짓밟아 버리고 잔인하게도 짓이기고 뭉겨서 찢어 죽여야만 했던 부모들의 무지한 소치와 무관심에서 나는 슬픔을 금할 길이 없다. 그래서 너에게 어린 생명이 살려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죄인이 회개하여 나에게 돌아오기를 원한다. 어린 생명이 모태에서 생길 때부터 그것은 핏덩이가 아니라 생명이 흐른다는 것을 모두에게 전해다오. (88 7. 29)

3. 사제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순명하며 그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여라.

나주에서 두번째 메시지를 주시던 날(1985년 8월11일) 성모님께서는 사제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모님께서 교회 안에서 사제들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과 예언된 성모 성심의 승리를 위해서 사제들의 역할이 얼마나 필수적인가 하는 점을 강조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 즉 교황 성하와 추기경들, 주교들 그리고 신부들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중추이며 악마를 쳐부시기 위한 그리스도 군대의 정예 간부들입니다.

물론 사제들도 인간이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권한과 사명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미사 성제를 거행하여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축성(祝聖)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으며, 고해성사를 통하여 신자들의 죄를 참으로 사(赦)해 줄 수 있고, 다른 성사들을 통하여서도 은총을 전해 주며, 신자들과 세상에 계시 진리를 가르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며 양들을 돌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작은 그리스도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왜 우리가 사제들을 존경하고 순명하고, 사랑하고, 도와 드리고, 또 그 분들이 악마의 공격에서, 보호 받고 성인 신부들이 될 수 있도록 항상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드려야 하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 사제들을 위하여 너희들이 희생 제물이 되어라. 내가 도와 주고 있다. 그러니 끝까지 보호하여라. 그들은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85. 8. 11)

* 사제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여라. 피땀을 흘리는 듯한 너의 고통은 사제를 위해서 힘이 될 것이다. 배은 망덕으로 오류에 빠진 자들을 위해 사제들이 일할 때, 너희의 희생, 보속이 따르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들을 죄에서 해방시킬 수 있겠느냐? 자! 사제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깨어 기도해다오. 시급하구나. (87. 4. 18)

* 신자들은 교황과 추기경, 주교, 모든 사제들에게 순명하기 바란다. 그들은 나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들이며, 죄로 더러워진 무수한 영혼들의 죄를 사해주기 위하여 내 아들 예수의 능을 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내 아들 예수도 그들에게 순종하여 하늘에서 부터 세상에 내려온다.  (87. 6. 29)

4. 봉헌된 삶을 살아라

* 매사에 자랑하지 말며 겸손과 사랑으로 좋은 것을 소유하지 말고 순례자나 나그네처럼 살아가자. 천상의 이 엄마의 품에 안길 때까지 언제나 가난하고 작은 자 되어 모든 이를 섬기는 자가 되자꾸나.
성인 성녀들의 발자취를 따라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간다고 할 때 어떠한 비판 속에서도 너무 마음 쓰지 말며 많은 채찍을 받는다 해도 다른 이에게 평화를 주고 희생과 보속의 생활로 남에게 이득을 주는 일을 하자. 매일 매순간 자신을 낮추어서 갈바리아 예수님을 생각하고 가난, 겸손, 순종, 정결을 통해서 완덕의 길을 걷기 원하는 나 어머니를 따라서 높은 데서 자꾸만 내려가자. 스스로 낮아지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낮아져야 되지 않겠느냐. 더 많이 생활을 바꾸어 보자.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리고 너희 모두의 가치관마저도 버리자. 회개의 삶, 매순간마다 회개하여 예수님과 대화 나누자. 회개라는 것은 죄만 통회하는 것이 아니라 울며 후회하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세속적인 생활을 끊어버리고 복음적인 생활을 그대로 실천해 보려고 노력하자. 백합처럼 청순하고 순결하게 살아 보려고 하였던 그 의지 그대로 살아가자. 고단백일수록 썩으면 냄새가 더 고약하고 태양이 빛날수록 어두움이 짙으다. 다시 한 번 죽고 그리스도를 닮자.(1987년 6월 14일)

주님께서도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 너희들의 잘못을 단순하고 겸손하게 인정하고 순명하여 내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신뢰로써 더욱 강렬하게 작은 자의 사랑의 길을 갈망하여라. 그러면 쾌락과 명성, 지위와 권력과 지상 재화 그리고 자존심과 체면 존중이 변하여 영웅적인 행위로 바뀔 것이다. (92. 12. 8)

주님과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우리들이 마음 속에서 모든 허황된 집착들, 즉 재물과 명성과 업적, 다른 이들의 존경, 쾌락, 편안한 삶, 지나친 취미 활동, 특히 자아를 만족 시키려는 데 대한 집착들을 버리며, 그 대신 천주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들, 즉 겸손과 사랑과 순명, 맡은 바 임무에의 충실과 근면, 다른 이들(그들의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에게 대한 관용과 존중과 봉사, 그리고 기도 등으로 채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가까운 적(敵)은 스스로 높아지려 하고 스스로를 변호하려 하고 스스로의 만족을 추구하려 하는 우리들 자아이므로, 무엇보다도 우리들 자신이 그 어느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하며, 다른 이들이 비난할 때 화를 내거나 섭섭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며, 다른 이들의 칭찬에 만족을 느껴서도 안 됩니다.

오로지 우리가 추구할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또한 이에 자신을 봉헌하여 참여하는 것입니다.

5. 내 아들 예수와 내가 인류 구속을 위해 받는 고통에 참여하여라

* 그들은 오히려 자신을 앞세우는 불경과 나의 메시지를 저버리고 배신하는 무례함 때문에 내 아들 예수에게 큰 아픔을 드린다. 그래서 계속 잔혹하게도 매질하고, 경멸하고, 모욕을 드림으로써 지금도 계속해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고 계신다. 죄를 지은 불쌍한 영혼들, 위선 때문에 영혼이 파멸에 이르는 불쌍한 나의 자녀들, 죄 중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 아들 예수는 비싼 희생을 치루었는데도 그 고마움조차 모르는 채 무관심 속에서 생활하기에 너의 고통을 더욱 아름답게 봉헌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나의 뜻에 의심 없이 따라 주기 바란다. 너희들의 많은 고통이 하늘에 많은 기쁨을 쌓는다는 것도 또한 믿어 주기 바란다. (88. 2. 4)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의 수난과 죽으심으로써 인류의 구속 사업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의 구원이 자동적으로 이루어 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만으로 구원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에게 '주님, 주님'하면서 어찌하여 내 말을 실행하지 않느냐?"(루가 복음 6장 46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 각자의 구원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그의 신비체인 교회에 연결되어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워 놓으신 무한한 공로에 의지해 은총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라 자아 부정과 애덕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신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나가고 계시는 구속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신자라고, 교회의 구성원이라고 자처하면서 사실은 기도와 보속의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아무 것도 공헌하지 못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구속 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부르시고 계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사업에 참여할 자격이 스스로서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참여하면서도 모든 필요한 은총이 성모님을 통하여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어떠한 선도 우리들 자신에서 유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모든 영광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6. 나의 사랑의 메시지를 온 세계에 전하여라

* 어서 모든 자녀들이 눈물과 피눈물로 호소하는 나의 말에 응답하여 회개하도록 서둘러 온 세상에 나의 사랑의 메시지를 용감하게 전하여라. 비참해져 가는 이 세상이 나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위험한 시련의 이 시기에 모성 지극한 나의 현존을 체험할 것이며, 이 세상은 정화되어 하느님의 의노가 풀려 나의 성심이 반드시 승리하여 주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게 될 것이며, 그 때에 나를 위하여 일하는 너희들은 반드시 나의 곁에 서리라. (94. 1. 21)

위의 메시지 외에도 성모님께서는 누차에 걸쳐서 당신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서둘러 전파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티없으신 당신의 성심이 승리하고 주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은 전 세계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의 메시지를 잘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주 소극적이며 편한 길을 택하려는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즉, 모든 것은 천주님의 힘으로 이루어질 것이므로 우리는 수동적으로 있으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와는 정반대로 우리가 용감하게, 힘차게, 순교자의 정신을 가지고 당신의 원의를 따르며 주님을 따르도록 요청하고 계십니다. 마귀도 그의 악한 계획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많은 인간들을 통하여 분노와 증오를 조장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류들을 침투시키고, 인색함과 음욕을 북돋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뜻을 인간들을 통해서 성취하십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며, 또 성모님께서는 우리들의 도움을 끊임없이 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안일한 사고 방식과 생활에 젖어 있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메시지와 징표들을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경각심을 요구하시고 당신과 함께 희생적으로 싸워 줄 수 있는 진정한 일꾼들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의 천상 어머니께서 당신 성심의 사도가 되라고 부르시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예외없이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 너희들 자신만의 만족을 찾지 말고 단순하게 나를 사랑하여라. 사탄의 횡포가 무서운 힘으로 점점 커져 가고 있는 지금, 열심한 영혼들까지도 나를 배척하게끔 사탄이 기승을 부리고 있구나. 나를 도와다오. 너희 모두가 영혼을 구하도록 나는 너희에게 성심의 빛을 주겠다. 내 불타는 성심의 빛을 받아 성심의 사도가 되어다오. (87. 5. 17)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소식은 전 세계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도가 아직은 완만하여, 너무나 사람들은 나주에서의 계시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모님의 마음은 더욱 아프실 것입니다. 나주 소식은 대개 나주를 다녀온 분들의 증언을 통해서 또는 지금까지 준비되어 온 출판물들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성모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힘차게 그리고 바르게 전 세계에 전파되기 위해서는 주님과 성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유 때문에 희생적으로 나서는 작은 일꾼들이 많이 있어야겠습니다.

 7. 기도하여라. 열심히 기도하여라

"너희가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요한 복음 15장 5절)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진리, 생명, 선함, 사랑은 천주님께로부터만 유래합니다. 그리고, 천주님께서는 무한히 자비로우시며, 항상 당신의 자녀들에게 충만한 강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므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좋으신 우리 아버지께 그 분의 사랑스럽고 신뢰하는 자녀로써 은총들을 우리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위해 구해야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한한 공로를 세워 놓으셨고, 또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기도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신뢰심을 가지고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 알퐁소 드 리구오리의 말씀에 의하면, 특별한 은총은 우리가 꾸준히 인내심과 신뢰심을 가지고 구해야만 하느님께서 주신다고 합니다 (구원과 완덕에 이르는 방법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성모님께서 모든 은총의 중개자가 되신다는 점, 즉 성 벨라도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께서는 성모님께 당신의 은총을 충만히 채워 주셨고 또 성모님을 통하여 이 은총이 우리들 모두에게 흘러가기를 원하신다(성 벨라도 설교집)는 점을 명심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랑과 신뢰심을 가지고 성모님의 중개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와 온 세상에 우리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가장 유익한가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우리보다 훨씬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오 복음 6장 33절)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도 열절한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 누차에 걸쳐 강조하셨습니다.

* 어서 서둘러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라.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사도들이 나와 함께 모여 기도하며 성령 강림을 준비하였듯이 너희도 내 티없는 성심 안에서 이 마지막 시대의 사도들이 되어 나와 함께 기도하자꾸나. (95. 11. 21)

* 자신들의 멸망의 길에서 되돌아설 줄 모르는 영혼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85. 9. 15)

* 세계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끊임없이 함께 기도해야 한다. (89. 1. 29)

따라서, 우리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뿐 아니라, 전 세계의 운명이 우리들의 기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특별히 묵주 신공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으며, 묵주 신공은 마귀를 퇴치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파티마에서 주셨던 말씀, 즉 첫 토요일 신심을 잘 지킬 것을 부탁하셨고, 또 매주 목요일마다 예수 성심이 받으시는 모욕과 성체 성사를 거슬리는 죄들을 보속하기 위하여 성시간 기도를 바쳐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열절한 기도가 이 세상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얼나마 중요한가를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 지금 이 시대는 노아의 홍수 때보다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보다도 더 많이 부패한 대타락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대이변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데 너희가 이렇게 모여와 기도해주니 하느님의 진노하심이 늦추어지는 것이다. (1996년 6월 27일, 성시간 기도회 중에 주신 말씀)

열절한 기도를 바침으로써, 우리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주님과 성모님을 도와 드릴 수 있고 따라서 우리와 다른 이들에게도 유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999년 5월  
이명길 사도요한
 

 

 


인터넷 상에서의 나주 토론 - 방 인권 형제님께

 

안녕하십니까?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교육 중이시라 답신을 받기 어려우실 것이라고 하셨는데, 나중에라도 보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형제님의 글이 일단 공적인 토론의 장에 올려진 이상 그 글을 읽게 되시는 많은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답변이 바람직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답변을 올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나주에 관한 토론에 있어서의 저의 역할에 관해 언급하셨는데, 어느 특정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법도 없고, 누구나가 자신의 신앙과 양심을 토대로 하여 참여할 수 있는 토론과 의사 전달의 장입니다. 저 역시 이곳에 올라오는 국내외의 여러 형제 자매님들의 글로부터 많은 귀중한 것들을 배우고 있으며 그분들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매개체를 진정으로 진리를 위하고 성 교회의 선익을 위하는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많은 이들을 위한 귀중한 열매들이 맺힐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되도록 많은 분들이 주님과 성모님을 사랑하고 형제 자매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자유롭게 적극 참여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크고 작은 의견 차이들이 표출되기도 하겠지만, 모두가 상대방에 대한 선의를 유지하고 진리와 진실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면, 토론 과정의 의견 차이들은 오히려 서로의 이해를 넓고 깊게 해주며 보다 실속있는 일치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여러 지역에 계시는 자매님들께서 이곳에 올라오는 글들을 복사하여 많은 교포 신자들에게 보내드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반응들이 상당히 좋다고 합니다.

방 인권 형제님의 글의 요점은 교회 안의 일치를 위하여 공지문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기다리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일치를 깨는 것은 가장 나쁜 일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교회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좋은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미 이전의 글들에서도 누차 언급되었듯이 공동체 안에서의 일치의 도모는 우리의 신앙과 양심에 대한 충실과 함께 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진리를 바로 전하는 것은 교회의 기본 기능입니다. 만약 교도권의 행사와 진리 사이에 괴리 현상이 발생했을 때, "공동체 안의 일치"라고 하는 대의명분을 위하여 진리 쪽을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특히 진리의 전파를 至上 과제로 하는 교회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제 개인의 얘기를 하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나, 모쪼록 양해를 구합니다. 저는 장로교 목사님 가정에서 자랐는데, 고등 학교 시절에 좀더 충실한 크리스챤이 되기 위해서는 종교 개혁 이전의 그리스도교 즉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상식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신교에 대한 불만이라든가 회의에 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상대방을 모른다든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하나의 약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며 떳떳한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서점에 가서 천주교 서적들을 사다가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예배당에 가기 전에 성당에 가서 미사 구경도 했습니다. 아직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이 시작되지 않았던 1960대 초기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천주 교회가 예배당에서 가끔 들어왔듯이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특히 많은 성인들의 전기는 저에게 전에는 몰랐던 하느님의 사랑과 현존과 거룩하심이 지상에서 실현됨을 똑똑히 보여주었습니다. 저에게는 신앙적으로 하나의 지진과도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았던 교리적인 의문점들은 높은 장벽으로 남아있었고, 이 문제들과 씨름하기를 2년 가까이 한 후에야 겨우 개종의 결심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위의 거의 모든 분들이 개신교 신자였고, 더군다나 목사님의 아들로서 개종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은 그래도 잘 이해해주시는 편이었으나, 다른 여러 분들이 "일치의 유지"를 위하여 개종하지 않도록 권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양심 상의 확신 그리고 이 믿음을 뒷받침해주시는 주님의 은총을 배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리반에 다닌 후 성세를 받았습니다. (나중에 아버님께서도 "방지거"의 본명으로 가톨릭 부주교님께로부터 병자의 성사를 받고 세상을 떠나셨으며, 미국 온 후에 결국 어머님께서도 아내와 함께 교리를 공부하고 개종하여 시카고의 한국 성당에서 성세를 받으셨읍니다.)

그런데, 지금은 공교롭게도 천주 교회 안에서 "일치"와 "진리" 사이의 갈등이라고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저는 천주교에 들어와서 여태까지 35년 동안 이러한 갈등을 한 번도 겪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가톨릭 서적들의 내용은 진리의 말씀들이었고, 신부님들의 가르침은 하등의 의심없이 완전한 신뢰심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그분들도 사적으로는 제한점들을 가진 인간임을 알고 있었으며, 학교의 성모회 중심으로 여러 신부님들과 등산도 다니는 등 인간적으로 친하기도 했습니다. 주교님들은 가까이 다가가기조차 어려운 아주 높으신 분들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이러한 마음의 자세는 예전보다 약간 성숙했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대체로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저는 가톨릭 교회가 주님의 계시 진리를 충만하게 그리고 오류없이 유지하고 또 전해주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또 저는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이야말로 무한히 높으시고 거룩하신 주님을 대신하여 성사들을 거행하고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시며 신자들의 영적 안위를 돌보아주시는 지극히 고귀하시고 고마우신 분들임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 광주의 공지문 관계로 토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성직자들께 대한 마음과 자세는 변함이 없습니다. 또 사실 공지문 관계로 현재 저와 의견이 다르신 신부님들은 전체 가톨릭 교회 안에서 소수에 불과하심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만약 일시적인 문제점이 있으면 고치면 되는 것인데 그것을 인간적으로 어렵게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교회 안에서는 누구나가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며, 또 서로를 감싸고 위해주어야 하는 것이며, 잘못이 발생했을 때 이를 고친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교도권이나 다른 어떤 명분으로도 계시 진리가 희생될 수는 없다라는 점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등을 인용하여 여러 번 설명되었습니다. 교도권은 신자들에게 진리를 바로 전하기 위하여 있는 봉사의 기능임도 강조되었습니다. 교도권도 하나의 권한인데 그 권한으로써 개인들이 그들의 양심을 거스리도록 요구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권한보다도 교도권은 더 우리의 양심과 부합되어야 하고 더 충실하게 진리를 수호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삶을 살기 위하여 교회에 들어와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지난 2천년 동안 어떠한 내외부적인 압력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주신 순수한 진리를 지켜왔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며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교회를 당신의 티없는 신부(新婦)로서 사랑하고 계십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진리를 양보할 수도 있다," "진리도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라는 사상이 교회 안에 침투해 있다면 우리는 이를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일치"라고 하는 명분을 위해서도 진리는 희생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진리를 양보하여 얻어지는 거짓 평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써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지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노라" (마테오 10장 34절).

그러나 "일치"라는 것이 가치가 없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의 공동체들 안에서 사랑의 일치는 지극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는 "공동체 안에서의 일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우리는 명시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천주 교회 안에서 일치의 기준은 가장 선차적으로 (1) 신앙의 유산 즉 정통 교리와 (2) 교황의 수위권입니다. 본당이나 교구 등 지역 교회 안에서의 일치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본당 신부님을 중심으로 사랑과 화목으로 뭉쳐야 합니다. 그리고 주교님을 중심으로 한 가족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단위에서의 일치는 신앙의 유산 및 교황권이라고 하는 기준에 최우선적으로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정통 교리에서 부분적으로라도 이탈된다든가, 교황님의 지도를 경시하는 상태에서의 지역 교회의 독립적인 일치가 이루어진다면 이는 건전한 일치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의 가능성은 세계의 어느 지역 교회에서든 존재한다고 봅니다.

물론 교회는 지역 교회의 독특한 문화적 유산을 존중하며, 가톨릭 신앙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지역적인 문화의 포용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역 교회에서 발생하는 신학적, 전례적, 신심적인 전통이 사도 전래의 전통에 부합되지 않을 때 즉 신앙의 본질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위험이 있을 때에는 이 지역적인 전통들을 수정 내지 파기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 83조 및 제1204-1206조 참조).

결국 나주의 일들에 관한 논의들도 한국 교회 내에서의 일치 및 한국 교회의 전통의 맥락에서만 고려해서는 안되며, 사도전래의 신앙의 유산에 의거하여 교황님을 중심으로 한 전체 교회의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지금 공지문 상에 발생한 교리적 문제점들을 덮어둠으로써 한국 교회 안의 일치를 유지한다고 해도, 그렇게 얻어지는 일치가 전체 가톨릭 교회 안의 일치라고 하는 보다 우선적인 목표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교회가 지향하는 참된 일치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회사라든가 정치 단체, 또는 친목 단체 등의 인간적인 단체와는 다른,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단체입니다.

그리고 이미 다른 분들도 지적하셨듯이 나주의 일들에 대한 인정을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교도권에 겸손과 인내를 가지고 공손히 기다리는 것은 신자로서 가져야 할 필요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주의 인정만이 당면 사안이 아닙니다. 공지문 상에는 특히 성체 성사에 관하여 세 가지의 심각한 교리적 문제점이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교도권에 의하여 정통 교리가 잘못 제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사 위원회의 주요 교의 신학자께서 쓰신 논문에 의하면 공지문 상에서 나주의 성체 기적들이 부정되었던 진정한 이유는 개신교와의 일치라고 하는 전제 하에서 발전된 새로운 성체 신학에 그 성체 기적들이 부합되지 않기 때문임을 밝히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통적인 교회의 성체 도리, 즉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주님의 살과 피의 실체로 참으로 변한다라고 하는 교리가 양보되고 밀려난 것입니다. 그러한 새로운 신학을 지켜주기 위하여 우리가 정통적인 성체 도리를 양보하고 그 도리를 뒷받침하는 징표들에 대한 단죄를 양심 상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입니까? 지금 모든 신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선택은 교도권에의 순종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도권에의 순종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습니다. 문제는 정통적인 신앙이 가리워지고 잘못 제시되는 것을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교도권의 이름으로 교리상의 문제점들이 제시되어 있다면, 이의 시정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교도권을 수호하는 길이라고 봅니다.

이처럼 나주에 관한 논의는 교회 전체에 그 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라는 오도(誤導)된 기치(旗幟) 하에서 유포되어온 정통 가톨릭 신앙의 희석(稀釋)이라는 문제와 불가분의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떄문에 그 문제를 정식으로 다루고 해결하는 것이 시급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가톨릭 신앙을 지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무슨 계기(計器)들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가끔 그 계기들이 정확한지를 점검하며 필요한 조정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개인의 신앙 생활도, 우리 본당에서의 생활도, 그리고 우리 교구 차원에서의 일들도 신앙의 유산과 교황님의 지도에 잘 부합되고 있는지를 항상 점검하고 필요할 때에는 조정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주님의 뜻에 보다 더 부합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특히 나주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신앙의 유산에 다시 충실하고 교황님을 따르도록 말씀과 징표들로써 도와주고 계십니다.

첨언:  한 가지 덧붙입니다. 형제님의 글 일부를 인용합니다. ". . . 저는 교회의 서적을 읽고 묵상하기도 바쁘고, 성서의 내용을 실천하기도 어렵구요. 현재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살아도 충분하기 때문에 새로운 메시지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거든요.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끝으로 저는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하지만 교회 일을 생각하고 활동하고 공동체를 가꾸는 데는 2등하기 싫습니다. 그렇게 표현도 자주하고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제가 느끼기는 저처럼 열심히 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위의 말씀은 소위 사적 계시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 공동체 안에서의 봉사에 열심하면 되는 것 아니냐 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어떤 분들은 비록 어떤 메시지나 징표들이 진실된 경우에도 이를 신자들이 꼭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사적 계시들이 믿을 교리가 아니라는 뜻이라면 이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공생활 및 사도들의 시대에 공적 계시를 완성하셨으므로, 그 후에 새로운 믿을 교리를 주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적 계시들이 믿을 교리냐 아니냐 하는 것이 지금 현안 문제가 아닙니다. 나주에서의 일들이 믿을 교리라고 주장하거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일들이 기존의 믿을 교리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고 그 교리들을 충실히 뒷받침하고 있다라는 점은 우리가 꼭 주시해야 할 사항입니다. 결국 사적 계시들에 관한 우선적인 사항은 그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아무도 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계시하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라고 하는 실천 상의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녀들이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장병들이 장군의 명령에 귀기울여야 하며, 운동 선수들이 코치의 지시를 따라야 함과 유사할 것입니다. 사적 계시 또는 트렌트 공의회의 문서에서는 이를 특별 계시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계시들은 이미 주신 진리를 우리가 더 깊이 깨닫고 이에 더 충실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탈선할 때 바른 궤도로 다시 불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별 계시는 어떤 시대에 특별히 적용되는 하느님의 의사 전달이십니다. 우리가 이를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계시들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에 부합되지 못함이 될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에 노아를 통한 하느님의 경고를 많은 이들이 무시했다가 대홍수에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성의 왕과 백성은 요나 선지자를 통한 하느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현 시대의 특수 계시들은 현 시대의 전체 교회와 전 인류께 주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이시니 그분의 뜻하심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가장 율법을 잘 지키고 신앙이 좋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이들이 천주 성자께서 막상 그들 앞에 서셨을 때에 그분을 몰라보고 박해했었음을 다같이 묵상했으면 합니다.

이 분도 드림
1999년 8월 10일
미국 오레곤 주 그레샴 시
 

 


방인권 형제님께 보냅니다.

 

방인권형제님의 글을 읽고 제가 느낀 점을 적어드리고자 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이 글은 단지 개인적인 저의 생각일 뿐이지 나주의 성모님발현을 믿는 이들의 대표자적인 성격에서 쓰는 글은 아니라는 것을 밝혀드리고 싶습니다.

처음 도입부분에서 풍겨지는 온화함에서 저는 이 글이 읽어 볼만한 글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대개의 경우 나주의 성모님발현에 대해 의구심을 갖은 분들의 글은 형제적인 조언이라기 보다는 조소와 비아냥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읽어가는 동안 평화를 잃게 하곤 합니다. 물론, 발현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는 모든 글들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몇 분의 글들에서 교도권에 대한 순명과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리 안에서 고민하며, 나주의 성모님 발현을 어떻게 이해하고 전파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는가를 고민하는 저에게 도움이 되었던 글들도 있었습니다. 이 게시판을 들르는 기쁨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그런 글들을 접함으로써 저의 분별력을 기르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님의 글도 그런 기쁨을 기대하며 읽어 내려갔지만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실망하였습니다. 형제님의 글은 조소와 비아냥을 넘어서서 "두고보자"라는 식이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씀을 한다 하더라도 "너는 틀리고 나는 맞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두고보자."라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말이나 글로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형제님께서 나주의 성모님발현을 믿는 분들에게 던지는 말씀 중에 하나는 '개인적인 진리를 맞다하고 교회는 교도권을 남용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주의 성모님발현을 믿는 분들의 고민은 형제님의 말씀대로 '교회의 일치와 진리 안에서 어떻게 식별하고 생활할 것인가' 입니다. 분명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에는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사람의 판단에 따라 그 일은 악이 될 수도 있고 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악으로 다가온 일도 선으로 바뀔 수가 있으며 반대로 선으로 다가온 일도 악으로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구별해 낼 수 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런 일들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성녀 소화데레사께서 "사랑은 제 안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지요."라는 말씀처럼 오직 사랑에 의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으로 들려주는 음성에는 사람은 귀를 기울이겠지만 조소와 비아냥을 들려주는 음성에는 사람의 귀는 문을 닫아 버릴 것입니다. 그럼 서로 자기 얘기만 하다 끝나 버리겠지요.

저는 그런 글들을 쓰시는 분들을 보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분들의 말씀대로 나주의 성모님 발현이 가짜이고 공지문이 옳다면 나주의 성모님 발현을 믿는 분들은 대단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단히 측은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정말이지 가난한 사람들을 본다면 그리스도 신자로써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사람들을 본다면 마땅히 사랑을 가지고 부드럽고 온유한 마음과 말씨로 어떻게 하면 오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내 볼까 하는 마음에 안타까워해야 도와 줄수 있는 여러 가지의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적 복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른 사이비에 빠진 사람들을 볼 때에도 그런 마음이 들진대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아 형제요, 자매로 부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투로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정말로 형제라는 사랑을 느끼신다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실 겁니다. 두 손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거긴 아니냐, 나랑 가던 길을 가자."해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애절하고 안타까운 사랑의 표현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고 "너는 틀렸어, 너는 틀렸어, 두고 보자, 두고 보자."하며 약을 올리듯이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옳은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어투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분노하게 만듭니다. 분노하는 영혼에게 바른 식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영혼은 영원히 자신의 길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형제님께서 원한 것이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형제님의 행동은 사람을 그렇게 몰고 가는 것이라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또 한 가지를 말씀드리자면, 저도 역시 형제님의 말씀대로 기도하며 나주의 성모님 발현이 인정받을 때까지 침묵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저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무어라도 해야지 만이 저의 몫을 다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도 나주의 성모님 발현이 인정될 때까지 저에게 주어진 하나의 조그마한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나주의 성모님을 알지 못했으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성모님께서 받으신 따돌림과 이를 믿는 형제들의 고통을 안 이상,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주의 성모님 발현을 언젠가는 세상이 인정하도록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사람들에게 주어진 몫이 있습니다. 두손 놓고 앉아서 방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하느님은 인간의 몫을 조금 떼어놓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이래로 하느님께서 혼자 하신 일은 없습니다.

홍해를 가르실 때도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찍기를 원하셨고, 라자로를 소생시키실 때에도 라자로를 싸고 있던 베를 사람이 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하는 일은 그 정도의 아주 사소한 일입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될 일이며 아주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실천의 몫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가를 때에도 피난하는 이들의 긴박한 기도가 있었고 라자로의 소생 때에도 주위사람들이 눈물어린 간청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나주의 성모님 발현을 믿는 분들 중에도 아무런 말없이 침묵하시면서 기도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조그마한 몫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다할 때 하느님의 일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영성인 것입니다. 기다림의 영성을 사는 사람도 있고 한편에선 실천하는 영성, 탐구하는 영성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가 공존하며 연대하고 일치할 때 하느님의 구원사업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고 옳다고 생각하는 영성을-기도만을, 실천만을- 종용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국회의원님이나, 이분도형제님, 마르띠노 형제님, 그리고 이 게시판을 운영하고 계시는 분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아주 조그마한 몫을 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건 하느님을 비난하는 일입니다.

저는 오는 9월 초첨례에도 기도하러 갈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을 찾아가는 아닙니다. 물론 기적을 찾아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의 신앙에 대해 뭐라고 할 마음은 없습니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지를 보았기 때문에 그 분들의 기도가 이루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한편으로는 부러운 점도 있으며 더불어 그분들의 신앙이 더욱 성숙해 지기도 기도드립니다. 그건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나주를 거론하지 않아도 저나 형제님께서 계시는 본당에도 그런 분들은 계시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을 기적을 찾아 모여든 곳이라고 자체적으로 비난하는 신자들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이비교에서 그렇게들 가톨릭을 공격합니다. 그러면 그런 공격을 어떻게 변론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한 답이 형제님께서 나주를 찾는 분들을 기적을 찾아가는 분들이라고 정의하신 것에 대한 답이 될 것 같습니다.

기적은 매일 같이 일어납니다. 매일의 미사에서 성체의 기적이 일어나는데 굳이 나주를 관광버스를 대절해 찾아가는 것을 웃기는 일이라고 하셨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매일의 미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가 일어나는데 순교성지에 관광버스를 대절해 찾아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신앙을 견고케하기 위함입니다. 형제님도 순교성지에 한번쯤은 다녀오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 보시면 나주에 사람들이 왜 모이는 지를 이해하실 것이라고 봅니다.

순교자의 숨결이 살아 있는 성지에서 느끼는 체험보다 더 진한 신앙의 체험이 나주의 성모님 집에는 있습니다. 순교성지는 200년 전에 순교 당하시고 그 뜻을 기리는 곳이지만 나주의 성모님집은 바로 현재, 성모님께서 순교하시고 계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주에 모이는 분들 중에는 그런 성모님의 고통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모이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과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도 하나의 큰 기쁨과 위로가 되어 주곤 합니다. 방인권형제님도 초대하고 싶습니다. 같이 느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서로 간에 형제적 사랑이 배어나는 조언을 나누고 싶습니다.  

1999년 8월 26일
승근배(마르첼로) (worker@catholic.or.kr)
 

 

 


인터넷 상에서의 나주 토론 - "자유의 빛"님의 글을 읽고서

 

"은총은 강물처럼" 웹 싸이트의 자유 게시판에 나주의 일들을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 먼저 지금 전세계의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중요한 현안이 되고있는 나주의 일들과 그에 대한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에 관하여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한 의사 교환을 통해서 문제점들이 보다 확실하게 파악될 수 있을 것이고, 교회 안의 모든 활동들이 지향해야 할 주님의 진리에로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글을 올리신 분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자유의 빛"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자유의 빛"이라면 무슨 불의의 압제와 암흑에 대항한다는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교도권에 의한 주님의 가르치심보다는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로이 펴려고 했던 근세 유럽의 반항적인 계몽주의적인 냄새를 풍기는 것 같기도 같다.  사실 이 글을 읽으면서, 광주 대교구의 나주 관련 공지문을 읽었을 때 느꼈던 것과 거의 꼭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어쩌면 이 글이 그 공지문을 초안하신 분께서 쓰신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이는 그분이 밝히시기 전에는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만의 일이라도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중요한 책임을 지고 계시는 분께서 이름을 밝히고 자신의 말과 글에 책임을 지면서 의견을 발표해주셨어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 누구라도 떳떳이 토론에 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고, 또 진리의 편에 서있다고 믿는다면 숨길 것이 무엇인가?

신비 현상의 식별 기준은 공적 계시이다.

먼저 "자유의 빛"께는 "모든 신비 현상의 가장 근본적인 식별 기준은 그 현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완성된 공적 계시에 얼마나 부합하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글을 시작하셨다.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다.  결국 나주의 일들에 대한 분별도 가장 근본적으로 그 일들이 주님께로부터의 공적 계시 진리에 부합되느냐 않느냐 하는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만약 나주의 일들을 배격하는 분들이 그 일들이 교회의 공적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힐 수만 있다면 그분들의 판단이 옳은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자유의 빛"께서 올리신 글을 다 읽어보아도 공적 계시에 어긋난다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  나주의 일들을 배격하시면서 가장 근본적인 식별 기준은 공적 계시이다라고 선언하셨다면 나주의 일들이 왜 공적 계시에 어긋나는가에 대한 설명이 당연히 있어야 하고 그 실례들을 들어야만 글의 앞뒤가 맞는다. 그런데, 나주의 일들이 공적 계시의 어느 항목에 어떻게 어긋나는지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으면서, 단지 다른 곳들에서의 메시지들과 유사한 대목들 몇 군데가 있기 때문에 메시지의 진실성이 의심스럽다라는 주장만을 주로 하고 있다. 나주의 일들이 교회의 공적 계시에 부합되는가 하는 문제와 나주의 메시지들이 진실하게 전해져 있는가 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으며 따로 다루어져야 할 별개의 안건이다. 메시지의 진실성을 거론하면서 메시지가 교회의 공적 가르침에 어긋난다라고 판단내린다면 이는 죄의 항목을 잘못 짚은 것이요 애매한 이를 덮어씌우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1998년 1월 1일자로 발표된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에서는 나주에서의 성체 기적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라고 명백히 선언되어 있다.  어느 신비 현상이 교회의 공적 가르침에 참으로 어긋난다고 하면 더 이상 논의의 여지도 없이 끝장이 난 것이다.  일반 법정에서 말한다면 이는 사형 선고와 같은 것이다.  사실 공지문이 발표된 이후에 나주의 일에 대해서는 가지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고 하는 가혹한 제재가 한국 교회 안에서 가해져 왔다.  나주의 일들의 진실성을 계속 믿는 이들에게는 많은 박해가 가해져 왔다.  만약 나주의 징표들과 메시지들이 참으로 교회의 공적 가르치심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나주에 관한 모든 토론은 이 자리에서 깨끗하게, 하등의 미련도 없이 종료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나주의 일들을 반대하는 분들은 그 일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왜 부합되지 않는지 책임있는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적인 억지를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공지문 상의 교리적 문제점들

그런데 참으로 기막힌 것은 나주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선언한 광주 공지문의 내용이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지적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에 대해 교회의 많은 고위 성직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신자들이 공감하고 있다. 지금 교황청을 비롯하여 세계의 많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어떤 시각으로 나주의 일들을 보고 있는지에 대해 한국 내에서는 대체적으로 너무나 이해가 결핍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 지적들의 자세한 내용은 다른 지면들을 통하여 이미 설명되었으므로("진리와 교도권의 수호를 위하여" 책자 참조), 여기에서는 그 중에서 한 가지만 간추려본다.  

공지문에서는 "윤 율리아씨가 입에 모신 성체가 입안에서 살덩어리와 피로 바뀌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도,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실체 변화'한 후에도 그 형상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여야 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선언과 실제의 교회의 가르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제에 의한 성체, 성혈 축성 때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의 실체로 변하는 변화만 있고 빵과 포도주의 외양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  사제가 축성을 해도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체 변화만 있고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양의 변화는 없다는 뜻이다.  즉 성체 축성의 효과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공지문에서는 사제의 축성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하여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지속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 형상이 변한다면 이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공지문의 이러한 주장이 옳다면 2천년 교회 역사 상에 일어났던 수많은 성체 기적들이 다 부정되어야 하며, 그 성체 기적들 중 다수를 인정한 교회의 결정들이 다 실수였다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광주의 공지문에서는 성체 성사에 관하여 교회의 가르침에 없는 뜻을 새로 첨가하여 마치 이것이 교회의 가르침인 것처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변경하거나, 첨가하거나, 삭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교도권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공지문 상의 이러한 선언으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나주의 성체 기적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성체 기적을 단죄한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는 기막힌 현상이 전개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광주의 공지문이다.  공지문 상의 문제를 해결해야 진리의 순수성이 회복되고 교도권의 명예가 되찾아지며, 진리와 교도권을 주신 주님께 다시 충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순수한 주님의 계시 진리에 비추어서 나주의 일들이 시급히 재조사되어야 한다.

사실 위에서 지적된 사항은 많은 신자들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라고 보여진다.  신부님이면 하늘같은 분이시고 더군다나 주교님은 더말할 나위도 없는데, 주교님의 이름으로 발표된 문헌에 교리 상의 오류가 있다는 것은 좀체로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엄청난 일이 이미 일어나 있는 현실이니, 우리가 단지 주교님을 깊이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덮어둘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모든 주교님들과 신부님들께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언제라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교도권이 진리를 오류없이 가르치기 위하여 위임되어 있는 권한이지 어떤 사항에 진리성을 부여하거나 박탈하는 말하자면 진리 위에 서는 권한이 아님을 알고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86조 참조).  그 공지문이 광주의 대주교님 명의로 발표되었으니, 대주교님께서 이 문제를 확실하게 시정해주시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문제가 발생하게 된 책임은 우리 교회 전체에 있다는 점을 모두가 깨닫고 겸허한 회개의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교회는 물질주의, 인본주의, 현세주의의 침투로 인하여 엄청난 신앙의 상실, 진리의 왜곡을 겪어오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고귀한 가르침들을 잘못 이해하고 적용하여 현대주의적인 오류들이 유포되어왔다.  오늘의 광주 대교구 공지문의 문제는 그러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며, 신자들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위탁하신 순수한 신앙의 유산에로 다시 돌아가려는 범교회적인 노력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분별의 대상은 신비 현상 자체의 진실성이다.

2천년 전 예수님을 배척하던 이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트집을 잡아 그분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습니까?" "왜 당신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십니까?"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왜 당신은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십니까?" "당신은 마귀의 힘을 빌려서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까?" "왜 비싼 향유를 당신께 부어 낭비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권위와 힘이 담겨져 있었고, 그분께서 하시는 기적의 징표들은 그분께서 성부께로부터 오셨음을 증거하고 있었으나, 반대자들은 그 말씀과 징표들에 대해서는 눈과 귀가 멀어 단지 그분과 그분 제자들의 흠을 하나라도 발견하여 자신들의 불신앙을 정당화하고저 하였다.

오늘 나주의 일들과 그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2천년 동안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가 나주의 일들을 분별하는 활동에 있어서 그 초점은 과연 그 일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가 아닌가 하는 데에 맞추어져야 한다.  물론 율리아 자매의 신앙 생활이 건전한가, 심리 상태는 정상적인가, 윤리적으로 문제는 없는가 하는 등의 질문들이 중요하다.  왜냐 하면, 메시지와 징표들을 받는 이의 상태를 조사하는 것이 그 메시지와 징표들의 참됨을 분별하는 데에 중요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를 받는 이의 자질 그 자체가 분별의 궁극적 목표가 아님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계시를 받는 이에 대한 트집을 잡아서 계시 자체를 불신하려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공지문 상에도 분별의 초점이 잘못 맞추어져있다는 감이 드는 부분들이 있으며, "자유의 빛"의 글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계시 자체가 아니라 율리아 자매 자신을 분별의 대상으로 삼아 트집잡고 있다.

메시지의 표절이 있었는가?

"자유의 빛"의 글에서는 이러저러한 트집을 잡아서 율리아 자매가 메시지를 표절하고 조작한 것 같다라는 자신의 의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의심을 하고 않고는 개인의 자유이겠지만, 특히 공적인 지면에서 그런 언급을 할때에는 자기 말에 대한 공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나주에서의 메시지와 다른 곳들에서의 메시지들 사이에 몇 군데 유사점들이 발견된다는 것만으로써 "표절의 명백한 증거가 된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경솔한 처사이다. 내 것과 꼭같은 옷을 입거나 꼭같은 핸드백을 들고 가는 이에게 대뜸 다가가서 "당신이 내 것을 훔친 것이 명백하다,"라고 말한다면, 자칫 크게 망신을 당하기 십상일 것이다.  "자유의 빛"께서 "표절이 명백하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기 위해서는 훨씬 더 신빙성있는 증거가 있어야 된다.  자칫 애매한 사람을 잘못 단죄하면 그 엄청난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가?.

지금까지 율리아 자매를 통하여 주님과 성모님께서 주신 메시지의 양은 방대하다.  하나의 두꺼운 책을 이루고 있다.  양만 방대할 뿐 아니라, 그 내용 또한 확고한 목적성 밑에서 산만함이 없이 현재 교회와 세계의 신앙, 도덕 문제를 광범위하게, 심도있게 다루면서 그리고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도 더한 강함과 애절함을 가지고 장엄하게 전개되어 있다. 그 수많은 메시지들과 징표들 전체가 하나의 통일되고 잘 조화된 교향악처럼 짜여져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 깊이를 깨닫게 되고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 메시지들 안에는 성모님께서 "하늘과 땅을 잇는 끈," "보속의 협조자" 및 "공동 구속자"가 되신다고 하는 실로 엄청난 교리적 내용들도 들어있다.  현재 교회가 처한 심각한 신앙의 위기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으며 그 위기를 극복할 효과적인 처방도 알려주신다.  이러한 엄청난 규모와 깊이와 아름다움의 메시지들을 그 아무리 지능이 뛰어난 인간이라도 조작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그 메시지 전체를 선입견없이 읽어봄으로써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중학교조차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메시지가 시작된 1985년 당시 교회에 들어온 지 몇 년밖에 안되었던 율리아 자매가 이러한 메시지들을 지어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방대한 양의 메시지들 중에서 간혹 몇 군데 다른 곳에서의 메시지와 유사하다는 곳이 발견된다고 하여 메시지가 표절되었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다. 비록 메시지를 주신 장소와 시기는 다르다고 하여도 메시지를 주신 분은 같은 분이시며, 그 메시지를 주시도록 하신 분은 한 분이신 천주 성령이시다. 메시지를 주시는 목적도 늘 한 가지 뿐, 즉 우리들의 회개와 구원이다. 그렇다면 간혹 내용이 같고 비슷한 말이 사용된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부모님께서 멀리 여행을 가셨는데 집에 남아있는 자녀들에게 따로 여러 번 전화를 걸게 되었다면, 그 자녀들에게 간혹 같은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할 것인가?

만약 율리아 자매가 다른 메시지들을 표절했다면, 지난 14년간 율리아 자매 가까이서 그분을 돕고 관찰해온 수많은 사람들 중의 그 누군가가 이를 발견하고 증언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율리아 자매는 다른 곳들의 메시지를 전혀 읽지도 않으며 남들에게서 다른 곳의 메시지들을 전해받지도 않는다. 도대체 몇 군데 낱말이 비슷하다고 하여 다른 어떤 근거도 없이 애매한 사람을 표절자, 즉 메시지의 도둑으로 모는 것이 과연 가톨릭 신자로서 아니 민주 사회의 일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인가?

대성전 건립 문제에 관하여

1991년 가을에 성모님께서는 율리아 자매에게 대성전 지을 땅을 알려주시고 그 땅에서 메시지와 태양의 기적 등 징표들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그 땅을 기증하기로 했던 소유자가 그 땅을 교구에 기증해도 교구에서 나주 성모님을 위한 성전을 지어주시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 땅을 교구에 기증하였다.  그러나 주교님께서는 다른 시설을 생각하시고 그 기증을 받으셨던 것이다.  성모님께서 그 땅에 대성전을 원하셨다면 언젠가 반드시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당장으로는 그 땅이 교구에 다른 용도를 위하여 속하게 되었으니, 사정이 매우 어렵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당분간 메시지의 그 대목만은 발표를 보류하였다가 나중에 다시 삽입하게 되었다.  이를 들어 공지문에서 그리고 "자유의 빛"께서는 메시지에 인위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며 지적하고 계신다.  

그러나, 과거의 여러 경우들을 살펴보면, 메시지의 일부가 한 동안 공개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발표된 예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그 메시지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고 그 메시지를 삭제하려는 의도도 아니며, 그 당시의 특별한 사정에 의하여 당분간 발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는 배려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배려는 비록 인간들에 의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잘못이라고 잘라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배려가 불필요했었다고 하드라도 그 메시지 자체의 진실성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나주의 일들을 반대하는 분들이 거듭하여 율리아 자매 및 그 주위의 사람들의 흠을 잡아서 메시지와 징표들을 불신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메시지를 받는 이들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빌미로 하느님의 일들을 배격하려는 비합리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지난 14년 간 아니 그분의 일생 전체를 통하여 율리아 자매가 받아온 고통들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분의 순박함과 깊은 사랑과 희생심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하느님께서 왜 그 분을 당신의 특별한 일꾼으로 선택하셨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도 평범한 인간이고 따라서 인간적인 나약함도 있을 것이므로 이를 핑계로 그분을 통하여 주시는 하느님의 고귀한 선물들을 경솔히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베들레헴과 나자렛의 초라함을 보고서 예수님과 성모님, 요셉 성인을 비웃는 것과 같은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나주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을 세상이 미워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이미 알려주신 사실이고 실질적으로 거의 예외없는 법칙처럼 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의 빛"께서 쓰신 글 안에서 성모님께 대하여 언급할 때 존경심 없는, 조롱적인 표현들을 쓰신 부분들이 있는데, 모쪼록 이런 일들은 시정해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이다.

이 분도
미국 오레곤 주, 그레샴 시
1999년 6월 15일
 

 


인터넷상에서의 나주 토론 - 김 베드루 씨의 글을 읽고

 

1.  김 베드루 씨는 하느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누구든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구원의 진리를 꺠달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말 자체로는 하자가 없는 매우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리를 깨닫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교회에서 가르치시는 바 즉 정통 교리에 의거해서 개인의 신앙 생활을 추구해야 된다는 점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성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 즉 공적 계시만 있으면 된다는 이유로 사적 계시의 중요성을 부정 내지 경시하는 것은 아니기를 바랍니다.  사적 계시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 지면에서 따로 설명을 하는 것보다는 1999년 부활절에 발표하신 김 창렬 주교님의 사목 서한을 읽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사목 서한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2.  나주에서 성모님께서 영적인 사랑의 젖을 주어서 회개의 은총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이 되는 것이지 성모님의 젖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나주에서의 메시지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모님께서 영적인 사랑의 젖으로써 우리에게 회개의 은총을 주시겠다고 하셨지, 당신의 젖의 공로를 통하여 우리가 구원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께서 그리스도께로부터의 은총을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모든 은총의 중개자"이심은 많은 역대 교황 성하들의 문서들에서 언급되어 있고 또 많은 성인들이 가르쳐왔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도 이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967-970).  성모님의 젖이란 당신의 영적인 자녀들의 영적 양육을 위한 당신의 사랑을 상징하는 단어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의 공로에 의지하여 구원될 수 있다는 가르침과 아무런 어긋남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개념들을 통하여 우리들의 구원을 위한 성모님의 필수적이며 그리스도를 보조하는 역할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또 이는 나주에서의 메시지들과 징표들의 주요 주제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964).  현재 우리 교회 안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많은 신자들이 성모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성모님과 성모님의 역할에 대한 교회의 가르치심을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모님께 대해서 확실히 이해가 없으면, 천주 성자의 강생의 사실과 교회를 통한 그분의 강생의 계속 사실조차도 모호하게 되기 쉽습니다.  성모 신심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저렇게 생각한다고들 하지 말고, 다같이 교회의 가르치심으로 확실하게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둘째, 김 베드루 씨께서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나의 아들"이라고 거듭해서 부르심에 대하여 왜 하느님의 아들을 사람의 아들로 끌어내리느냐고 하면서 이 점 역시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주 성부의 독생성자이신 동시에 인간이신 성모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자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신성과 인성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천주 성자 한 분의 인격 안에서 완전히 결합되어 있습니다.  즉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인간이신 예수님이 따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인간 예수님의 어머님이시기만 하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니 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에페소 공의회를 통하여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모친"이심을 확인하여 선포했습니다 (431년). 이는 가톨릭 신자들이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완전한 진리로 믿어야만 하는 믿을 교리입니다 (DS #252).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나의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뿐 아니라, 천주 성자의 강생 사실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증거해주시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주에서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침, 즉 참 신앙의 길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수많은 신자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불확실하게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마치 나주의 일들이 참된 신앙에 어긋나는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하루 속히 그분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침에 보다 가까이 부합되도록 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나주의 일들에 대한 많은 오해들도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이 분도 드림
1999년 6월 20일
 

 


인터넷 상에서의 나주토론 - 베드루 씨의 글들에 대하여

 

이곳의 자유 게시판은 사사로이 서신을 교환하는 곳도 아니고 많은 이들이 보게 되는 공적인 정보 매개체이다. 따라서 이곳에 글을 올리는 분들은 진리와 사실과 양심에 충실하려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며, 자신의 말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성의와 자신을 가지고 임하시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베드루 씨께서 나주에 대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생각들을 피력해주셔서 일단 반갑게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들을 혼자서만 품고 있거나, 음성적으로 퍼뜨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공개 토론장에 올림으로써 보다 넓은 의견들을 모아볼 수 있겠기 때문이다.

1.  필자가 속해 있는 기관은 천주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신심을 전파할 목적으로 1992년에 설립되어 그 동안 여러 출판물들을 영어 사용 내지 해독 가능 국가들에서 배부해 오고 있다. 미국 신부님을 지도 신부님으로 모시고 정식 법인체로 설립되어 있으며, 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 그리고 가톨릭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신심을 전파하는 목적의 일환으로 나주에 대한 소식들도 전파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모든 영문 출판물들은 전부 교황 성하께와 교황청의 여러 성성들에 제출되어 오고 있다. 왜냐하면, 교황청에서는 세계적으로 교회 안의 현대주의의 문제점들로 인하여 크게 염려하고 계시며 나주의 일들에 대하여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이며, 또 본 기관으로서도 혹시라도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내용을 보도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교황청에서는 여러 차례 서한으로 격려해주셨다. 이것을 공식적인 인정으로 볼 수는 없지만, 교황청에서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아주고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격려되고 있으며 감사를 드리고 있다.

베드루 씨가 언급한 신앙 교리성성 차관의 성함은 "Bovone"이 아니라, Bertone 대주교님이시다. Bertone 대주교님께서 광주 대교구로 편지를 보내신 것은 필자는 알고 있지 않은 사항이다. 위에서 언급된대로 이곳의 모든 출판물들이 교황청으로 제출되고 있으니, 1993년이면 아직 초기였던 그 때의 신문을 보셨던 것 같다. 그 때의 신문에서 언급되었던 것은 윤 대주교님께서 나주의 일들 초기에 몇 번 호의적인 말씀들을 하셨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나주에서의 메시지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라는 말씀인데, 이는 1993년 당시가 아니라, 나주의 초기 시절에 대주교님께서 몇 분 사제들에게 말씀하셨던 사항이었음을 밝히면서 언급되었다. 이는 대주교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제님들이 계시니 이를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1998년 1월에 와서 대주교님의 명의로 부정적인 공지문이 발표되었으니, 지금에 와서 나주의 초기에 대주교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언급하는 것은 큰 의미도 없고, 또 언급하고 있지도 않다. 지금 베드루 씨가 1993년의 일과 그 전의 일들을 논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 때 그 사실이 언급된 것이 어째서 문제가 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2.  베드루 씨는 또 필자가 "리 순성 신부님의 글을 문제삼아 교황 대사관에 투서했다,"라고 하셨는데, 사실은 "교황 대사관에 투서"를 한 것이 아니라, 이곳의 출판물 상에 리 순성 신부님의 글에 대하여 자세히 논하고 이를 교황청에 정식으로 제출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리 순성 신부님께서 주교 회의의 "사목"지 1998년 3월호에 기고하신 성체 성사에 대한 글은 분명히 교회의 정통 가르치심에 어긋나고 있었으며, 이러한 글이 사적인 좌석이 아니라 공적인 매개체, 그것도 한국 천주 교회를 대표하는 주교 회의의 "사목"지에 실렸다는 것은 지극히 심각한 공적인 사실이었다. 이를 누가 공적으로 반박하지 않으면 그 교리적인 오류가 한국 교회 내에 묵인되는 결과가 될 수도 있었다. 뿐 아니라, 나주 조사 위원회의 총무이셨고 주요 교의 신학자셨던 리 순성 신부님께서는 그 글에서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에서 나주의 성체 기적들이 부정된 진정한 이유는 당신의 글에서 설명하신 개신교적인 성체 신학과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라고 밝히셨다. 만약 리 신부님의 주장이 반박되지 않으면, 나주의 성체 기적들을 단죄한 그 새로운 신학을 그대로 묵인 내지는 교회 내의 정통 가르침으로 인정해주는 셈이 될 것이었다. 미사에서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교회의 가르침이 배척되고, 그렇게 변질된 새로운 신학과 나주의 성체 기적들과는 서로 맞지 않으니 그 기적들은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라고 하는 것은 천주 교회 안에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기상천외의 논리였다.

베드루 씨는 리 신부님의 그러한 새로운 성체 신학을 지극히 정통적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필자는 베드루 씨에게 그 신학이 어째서 교회의 정통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지를 설명해보시라고 도전하는 바이다. 억지의 논리로서가 아니라 주교 회의에서도 인정될 수 있고 교황청에서도 인정해주실 수 있는 논리로서 말이다. 먼저 리 신부님의 그 글을 자세히 읽어보시고, 어째서 그 글의 내용이 옳은지를 확실하게 설명해주시기 바란다.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이름있는 신학자가 제시한 논리라면 무조건 교회의 정통 가르침과 대등한 것이 된다라든지, 또는 그 정도의 신학자시라면 교회의 교리를 변경할 수도 있으시다라는 것을 설명해보시기 바란다.

우리는 평신도지만,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교회에 위탁하신 진리들을 순수하게 교회로부터 가르침받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그것이 잘 안될 때에는 이에 대해 사목자들께 말씀드리고 청원드릴 수 있다. 이는 교회법에도 보장되어 있는 신자들의 권리이다.

3.  1998년 2월에 김 요셉이라는 분이 받으셨다는 메시지에 대해서, 그 분은 나주나 이곳과 협력 관계가 없는 분이니 필자가 변론을 할 입장이 아니다. 단지 그분의 글이나 메시지는 나주나 이곳의 의견이나 입장을 전혀 대변하지 않는다는 점만 밝혀두고저 한다. 보도되는 수많은 메시지들에 대한 필자의 입장은 대개의 경우 일단 부정적이다. 하도 황당한 메시지들이 많기 때문에 오직 그 메시지에 믿을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될 때에만 주의깊게 관찰한다. 1985년 나주의 일이 시작된 이래, 나주에 계신 분들과는 하등의 관계 없는 분들, 예를 들면, 인천의 인 베드로 같은 분들이 나서서 괴이한 행동을 함으로써 나주에 대한 인상을 흐리게 하고 유언비어가 나도는 데에 기여해왔다. 신자들은 영적 분별을 잘하여 유언비어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4.  필자는 지금까지 약 10년에 걸쳐 나주에 대하여 그리고 율리아 씨에 대하여 관찰하여 왔다. 그러나 그 기간 중에 율리아 씨나 협력자들이 황 테레사 씨에 대해서 연관이나 협력이나 긍정적인 언급이나 행동을 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보거나 들은 적이 없었다. 나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왜 옛날에 좀 알았던 사람들까지 들추어내면서 그것을 트집삼아 나주의 메시지들과 징표들 자체를 불신하려고 하는가?

필자는 황 테레사 씨에 대하여 많이 알지 못한다. 그분이 받았다는 메시지의 일부를 본 적은 있었으나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더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하여 판단을 내릴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그분도 천주교 신자이시니 신앙 안에서 자매이시고, 또 그분과 연관된 수도원들이 수원 교구 안에서 운영되고 있으니 그 때문에도 함부로 말하는 것을 삼가려고 한다.

얼마 전에 미국의 한 가톨릭 신문에서 이상한 기사를 본 일이 있었다. 교황 성하께서 어느 나라에 가셨을 때 미사 후에 많은 이들이 줄을 서서 한 사람 씩 성하께 인사를 드리는 사진도 실렸다. 그런데 마침 그 사진 안에는 성하와 인사를 나누는 어느 토속 종교의 여사제의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신문에서는 어떻게 교황께서 우상 숭배를 하는 이교의 사제와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눌 수 있는가 하고 교황 성하를 비판하는 글을 싣고 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성서에 보면, 바리사이 인들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비난을 퍼부었다. 자기들의 불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생트집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연관하여 부언할 것은, 나주에서의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불신하는 분들의 공통점 한 가지는 율리아 씨에게 주로 비난을 집중시킨다는 점이다. 이분들은 사적 계시를 분별함에 있어서 교회가 심사해야 할 주요 대상이 성모님을 통한 주님의 메시지들과 징표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율리아 씨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면 그분들은 반드시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성모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율리아 자매의 인간적인 한계점들을 주님께서 거두지 않으시고 그대로 두셨기 때문이다. 율리아 씨가 왜 완전무결하지 않으냐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스스로도 완전하지 않으면서 모순을 범하는 것이 아닐까? 필자가 대해 온 율리아 씨는 특별한 분이라기보다는 매우 평범한 한국 시골의 순진하고 인정많은 가정 주부이며 자녀들의 어머니였다. 특별하지 않고 평범하기에 대하기도 편안한 분이었다. 평범하기에 천사와 같으시기보다는 우리들 모두가 가지는 인간적인 한계점들도 가지고 계시리라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문제점을 가지고 계신 분도 아니었다. 좀 특별하다고 생각된 점이라면, 그 동안 장기간 동안 그렇게 심한 신체적 고통들을 받아오면서 또 온갖 유언비어로 억울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쓰러지거나 실망하지 않고 희생적으로 지탱해오신다는 점이었고, 또 주님과 성모님의 말씀대로 세상 사람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빨리 회개하고 생활 개선하기를 바라는 크리스챤적인 사랑의 열정에 불타는 분이라는 것이다. 어떤 때에는 그러한 열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에 의해서 "너무 나서는 사람"으로 오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십여년 동안 주님과 성모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오고 영적인 현실을 똑똑히 보아오신 분으로서 어떻게 그러한 열정에 불타지 않을 수가 있을까? 주님과 성모님의 좋으심을 보고, 인류의 죄악의 참담한 현실을 보고서 어찌 담담하게만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너무 우리 자신만의 좁은 기준으로 보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된다. 나주에서 우리가 율리아 씨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에 불타는 성심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 고통 받으시며 피흘리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 밑에서 피눈물을 흘리시는 성모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 함께 고통으로 신음하며, 이를 사랑의 희생으로 바치고 있는 연약한 율리아 자매가 있다. 이제 우리는 쓰러져 있는 그분을 더 이상 욕하고 발로 차고 할 것이 아니라 동료 신자로서 손을 잡고 일으켜주고 눈물을 닦아주며 함께 주님과 성모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다시 활성화하시기 위하여 교회 안에서도 가장 힘없는 평신도, 그것도 여자 평신도를 택하셔서 그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운 보속의 고통들을 지게 하시고, 교회 역사 상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더 강력한 메시지와 징표들로써 우리를 깨우치려 하고 계신다. 모쪼록 우리는 질그릇의 초라함을 꿰뚫고 그 안에 담긴 보화를 볼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현재 나주의 경당에 순례자들이 계속 모여오고 또 때로는 함께 기도도 하고 하는 것은 나주에서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순례자들 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이니 공적인 행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주에 순례자들이 계속해서 모여오고 기도하는 것은 광주 대교구에서도 알고 계시고, 한국 주교 회의에서도 알고 계시며, 교황청에서도 알고 계시는 일이다. 오라고 광고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가라고 시키는 것도 아니지만, 주님을 찾고 어머니를 찾아오는 자녀들의 애타는 마음을 어찌 막을 수가 있을까? 나주의 일들이 허위라면 막지 않아도 스스로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일들이 진실이라면 아무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지난 세기의 한국 신자들도 자신들의 생명은 버릴 수 있어도 주님께의 신앙과 충성을 버릴 수는 없음을 이미 보여주었다.

이 분도
Gresham, Oregon, U. S. A.
1999년 7월 28일
 

 


인터넷상에서의 나주토론 - 박 철순 형제님의 질문에 대하여

 

형제님께서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께서 성모님의 무염시태 도리를 부정하셨다고 하시면서 이 제민 신부님, 이 순성 신부님의 경우들과 연관하여 의문을 제기하셨습니다.  그렇게 위대하신 성인께서도 오류를 범할 수 있었는데, 한국의 두 신부님들께 대해서는 왜 그렇게 시끄럽게 떠드느냐라는 뜻으로 들었습니다.

먼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와 두 이 신부님들과의 경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성 토마스께서 사시던 13세기와 그 이전에도 무염시태의 도리를 이미 설명하고 널리 가르치는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있었으나 아직 교회에서 확정적으로 믿을 교리로 반포하기 이전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로서는 무염시태의 도리에 대한 토론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 도리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도 그러한 토론이 바람직했을 것입니다.  성 토마스의 초기의 저서들을 보면 무염시태 도리를 받아들이는 언급들을 하셨으나, 신학대전을 쓰실 무렵에는 그 도리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이는 쪽으로 쓰셨습니다.  그러나 성인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당시 무염시태 도리를 주장하는 일부의 신학자들이 마치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와는 무관하게 원죄가 없으시다라는 말들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렇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시다 보니 좀 지나치게 되셨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성인의 후기의 저서를 보면 또 다시 무염시태의 도리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전환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성모님께서는 하등의 티도 없이 가장 순결하셨으며 원죄에 물드시거나 마음으로 짓는 죄나 소죄를 지으신 일이 없으셨다,"라는 기록을 남기셨습니다 (J. F. Rossi, C.M., S. Thomae Aquinatis Expositio salutationis angelicae, Introductio et textus.  Divus Thomas, 1931, pp. 445-479).

그러나 한국에서의 몇 분 신부님들께서는 이미 공식적으로 반포된 교리들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시거나, 그 밖에 교회에서 확정적으로 결정한 가르침들과 법규들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해 오셨습니다.  광주 공지문 발표 2개월 후에 이 순성 신부님께서 "사목지"에 내신 글을 읽어보면, 이 신부님의 신학 사상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체 도리에 부합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체 도리를 더 깊이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글이 아니라, 개신교 사상에 접근되어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밖에 신부님들께서 말씀하시는 내용들, 즉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아니라 오직 성령께만 순종하는 신자들의 공동체라는 주장, 교계제도를 배격하며, 사제의 독신제 폐지를 주장하며, 여성 사제 제도의 도입을 옹호하는 등의 자세는 교회의 명확한 가르침과 법규들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께서 아직 반포되지 않은 무염시태 도리에 대해 논하시는 경우와는 도저히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성 토마스의 경우에는 교회에 대한 반항의 정신이 전무합니다.  특히 "공동선" 잡지 1998년 5월호를 보면 이 제민 신부님께서 세 분의 한국 신부님들께 두 차례에 걸쳐 경고를 하신 교황청에 대하여 그리고 교황청의 조치를 받아들이시는 한국 주교님들께 대하여 반발하고 원망하는 글을 쓰셨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으로부터의 이탈, 그리고 교회의 교도권에 대한 계속되는 반항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핵심 사항입니다.  제가 보기로는 이러한 신부님들께서 주도하신 나주 조사 위원회에서 부정적인 권고를 대주교님께 드린 일과 그분들이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 및 교황청의 교도권에 대하여 계속해서 반발하고 계시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한국 교회 전반의 상황과 연관된 사안이기도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이 잘못 이해되고 적용되어 마치 지금까지의 교리들과 신심들과 법규들은 더 이상 효력이 없으며 따라서 무시되거나 에누리되어야 한다는 듯한 인상을 유포하는 풍조는 특히 한국 교회 안에서 심했다고 봅니다.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 아직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과 신심에 충실하신 성직자들과 신자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물론 그렇지만, 현대적인 개혁 쪽으로 나가려는 분들이 유난히 많으신 까닭에 지금 특히 심한 진통을 겪게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주의 일들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교황청을 비롯하여 외국의 많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그 일들을 진실로 보고 계시는데, 유독 한국에서는 반대하고 저항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만큼 한국의 교회 내의 많은 분들이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과 신심들을 경시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합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그러한 진통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봅니다.  지금의 어려움들과 갈등의 아픔을 통하여 진리와 오류의 차이가 분명히 노출되며 한국 교회가 내적으로 거듭나고 활성화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제민 신부님, 이 순성 신부님, 박 철순 형제님, 그 밖의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론들을 제기하여 주심으로써 활발한 토론의 장이 마련되어 모두가 진리에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것은 현재의 토론들은 그 어느 신부님이나 다른 개인에게 불이익을 주고저 함이 아님을 밝히고저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 주님의 진리와 주님의 뜻을 찾고 따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함께 주님의 진리를 확고하게 포용함으로써 주님의 충실한 일꾼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어느 누구도 배척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서 일하는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분도
1999년 7월 5일
 

 


인터넷 상에서의 나주 토론 - 강 경식 형제님의 글들을 읽고서

 

먼저 강 경식 형제님께서 솔직한 의견들을 개진해주신 데 대해 반갑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의견이 다 같을 수는 없는 일이므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필요하고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토론을 함에 있어서 분노에 휩쓸리지 않도록 해야 겠고, 또 객관적인 진리보다는 나의 주장이 이겨야 한다는 아집만 없다면, 우리는 토론을 통하여 함께 진리에 도달할 수 있고 참으로 살기좋은 사회를 이루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단"이란 단어는 종교 문제를 토론함에 있어서 흔히 상대방을 극단적으로 공격하기 위하여 남용되고 있는 말이지만, 그 단어에는 명확한 뜻이 주어져있으니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089조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있습니다.

이단이란 세례 받은 후 천상적 가톨릭 신앙으로 믿어야 할 어떤 진리를 완강히 부정하거나 완고히 의심하는 것이고, . . .

즉 신자가 가톨릭 교회의 정통 가르침의 일부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이러한 입장을 시정하지 않고 고수할 떄에 이단(異端)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송두리째 거부하면 배교(背敎)가 되며, 교황 성하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교황님을 따르는 이들과의 일치를 거부한다면 이교(離敎)가 된다고 위의 조항에서는 이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를 들면, 성체 성사에 대하여 교회에서 가르치시는대로 믿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고수한다면 이단적인 자세가 될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셨고,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가르침을 부정하고 고집해도 이단이 될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안의 교계 제도와 교도권 자체를 배척하고 이를 고집해도 이단이 될 것입니다.  성모님의 무염시태, 평생동정, 천주의 모친이심, 몽소 승천 도리 중 어느 하나만 부정하고 게속 주장해도 이단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정통 가르침으로 가르치고 계시는 교리들은 매우 많기 때문입니다.

형제님께서는 이단을 "하나의 인정된 교회로부터 인정받지 않은 성향에 쏠려있는 사람(들) ... 쉽게 이야기하면 인정된 교회와 교리 등의 차이로 분열되어 나가게 된 그룹 혹은 사람"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그래서 광주 공지문의 내용과 이를 뒷받침하는 신학자들의 발표문들을 "공박"하는 것을 이단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계십니다.  즉 어떤 교구에 대해서 교리 상의 오류 운운하면서 "공박"하는 것은 이단적인 행위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교구에서 어떤 말씀을 하시고 가르침을 발표하시면, 이에 대하여 절대로 반박하거나 이의를 달아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곧 이단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물론 대개의 경우, 정상의 경우에는 위의 말씀이 옳을 것입니다. 교구 차원에서 교리적인 오류가 발표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구의 교도권 자체를 부정한다든가, 정당한 근거없이 교구의 가르침에 반박하여 나선다면 참으로 질책을 받아서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구에서 교리적 내용을 말씀하실 때 절대적으로 하자가 없으며, 따라서 신자들은 이를 맹목적으로 따라야만 된다는 뜻일까요? 다시 말해서, 지역 교회에도 무류지권이 주어져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교도권이 하느님의 계시 진리 위에 속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운동 경기에서 심판이 혹시 오판을 했어도 그대로 존중될 수 있는 것처럼 교구에서 가르치시면 혹시 틀렸드라도 두말없이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까? 공동체 안의 일치를 위해서 교리는 적당히 얼버무려질 수도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교회는 하느님의 진리와 은총을 전하는 하느님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적인 집단이 될 위험이 있지는 않을까요?

더 간단한 예를 든다면, 교리반에서 선생님이 "교회에는 다섯 개의 성사가 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는 학생이 일어서서 "저는 일곱 개의 성사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라고 말씀드리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일까요?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교리반에서 가르치시는 일부 신부님들조차도 잘못된 내용을 가르치시는 것을 가끔 보았습니다. 즉 "대죄가 있드라도 그냥 속으로 통회하고 영성체하면 된다. 고해할 필요가 없다,"라고 가르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때 그 신부님의 권위와 체면 때문에 "신부님 말씀대로 믿고 따르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신자의 본분을 바로 지키는 것이 될까요?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배반이 되지 않을까요? 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네스토리우스 총주교님께서는 그리스도께 두 분의 위격, 즉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와 인간이신 그리스도 두 분이 계신다고 가르치고, 따라서 성모님께서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일 뿐 하느님의 어머니는 될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즉 천주 성자의 진정한 강생 도리를 부정한 것입니다. 그 때에 신자들이 주교님의 교도권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을 틀린 줄 알면서 그대로 수용했다면 과연 그것이 교회에 충실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었을까요?

가톨릭 신앙의 아름다움은 개인을 오류와 죄악의 속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스스로의 양심과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존엄성을 수호해주는 동시에 그 자유인들이 신앙과 애덕의 동기로 인하여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에 사랑으로 복종하며 하나의 조화되고 생명력에 찬 전체를 이루게끔 해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의 개인성과 사회성이 다 보장되는 곳이 가톨릭 교회입니다. 이는 마치 아름다운 음악을 표출해내는 거대한 합창단이나 관현악단과도 같습니다. 그 단체 안에서 자신만의 기성(奇聲)을 고집하여 전체의 조화를 깨트리지도 않음과 동시에 모든 단원 각자가 강제나 공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정성껏 악보에 맞추어서 기쁘게 자신의 음성으로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세 분이 따로 계시나 하나의 본성을 공유하심으로써 완전히 일치해 계시는 성삼위(聖三位) 신비로부터 유래되는 인간 사회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지역 교회 내의 인간들 개성이 무시되고 그들의 양심이 짓밟혀지며, 오로지 공동체에 무조건 순응하라, 다시 말해서 맹종하라고 한다면 이는 전체주의이며 독재사회이지 가톨릭적인 사회, 즉 주님께서 세우시고 천주 성령께서 이끌어나가시는 교회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공지문과 신학 논문들 안에 문제점들이 있다고 양심적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이를 논하면 곧 교회에 불순종하는 이단으로 몰리게 된다면 이는 크리스챤의 진리가 실현되어있는 사회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도 "인간에게 있어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신앙의 응답은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제160조)라고 하여 신앙의 자유를 강조하셨으며, "모든 신자는 계시된 진리의 이해와 전달에 참여한다.  그들은 그들을 가르치고 온전한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 (제91조), "모든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평신도들은 세례와 견진을 통해서 하느님께로부터 사도직의 임무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의 소식을 사람들과 온 세상에 알리고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일을 수행할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 (제900조)라고 하시어 비록 평신도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계시하시어 교회에 위탁하신 진리를 오류없이 보존하고 세상에 전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지 않음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물론 오류가 있다면 이를 공식적으로 시정하는 것은 교계 제도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평신도들의 소리는 교도권을 가진 소리가 아니라, 광야에서 적적하게 울리는 소리일 뿐입니다. 그러나 평신도라고 하드라도 자신들의 양심과 지식에 따라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평신도들도 교리 공부를 열심히 하여 교회의 기본 가르침들을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건강해지고 활력에 넘치며 오류로부터 더 잘 보호될 수 있습니다. 안그래도 가톨릭 신자들은 너무 소극적이며 전교도 하지 않는다는 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속할 때에 우리의 양심과 지성과 자유는 덮어놓겠다고 서약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이 주님의 모든 진리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로 약속하며, 우리의 삶 전체를 완전한 선이시고 무한한 사랑이시며 유일한 창조주요 주님이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칠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고려로 인하여 하느님의 진리를 때때로 양보하며,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게을리하거나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평신도들이라 할지라도 교회 안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토론하는 것을 보고 "공박"이다, "불순명"이다, "이단"이다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정신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설사 그렇다고 하드라도, 성체 성사에 관한 공지문 상의 문제점들이 그렇게 심각하고 중요한 내용인가?  공연히 트집을 잡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아시다싶이 성체 성사는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요 모든 성사들의 으뜸이며 목표입니다. 왜냐 하면, 성체는 물건이 아니라 살아계신 온전한 그리스도, 즉 육화하시고 부활하신 천주 성자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사 안의 이러한 그리스도의 실재를 똑똑히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특별히 개입하시어 이루시는 성체 기적들은 그것들이 기이한 현상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적들이 우리에게 다시 일깨워주고 있는 주님의 진리, 즉 성체 성사 안의 주님의 실재라고 하는 진리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광주의 공지문에서는 그 기적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공지문을 쓰셨다고 믿어지는 교의 신학자 신부님께서는 "사목지"에 당신의 개신교적인 성체 신학을 발표하시면서 그러한 신학 사상이 공지문 상에서 나주의 성체 기적들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진정한 이유였음을 밝히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지문 안에 포함된 교리적 문제점들은 가톨릭 신앙의 핵심인 성체 교리와 심한 마찰을 일으키고 있으며 그렇기 떄문이 그것이 그토록 심각한 사안인 것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잘못된 것을 확실하게 고치는 것입니다.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의 신앙의 침식은 우리들 모두의 책임이기 떄문입니다.  주교님들, 신부님들, 수도자님들, 그리고 평신도들 모두가 함께 한 마음이 되어 문제들을 시정해나갈 떄 우리 모두는 주님의 교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 분도
미국 오레곤 주, 그레샴 시
 

 


인터넷 상에서의 나주 토론 - Peter 형제님의 글들에 대한 답변

 

먼저 외국에 계시는 분들께 공지문을 정확히 알리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저희는 광주 대교구의 영문 공지문 전문을 한 자도 틀리지 않게 함께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이는 저희가 번역한 영문이 아니고 광주 대교구에서 발표하신 영어 본문입니다. 받으시는 분들이 객관적인 판단을 하실 수 있게 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게시판 152번에 올라온 남아 연방의 가드윈 나도지 신부님의 편지를 보시면, 신부님께서 공지문을 읽으시고 피력하신 의견이 있습니다. 그밖에 지금까지 공지문에 관한 논평을 하셨거나 출판물들을 더 요청하신 외국 신부님들은 모두 공지문 전문을 검토하신 분들이십니다.

그리고 전에도 언급되었지만, 저희가 발간하는 모든 영문 출판물들은 교황청으로 제출되고 있습니다. 교황 성하께와 교황청의 여러 성성들에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저희가 다루고 있는 일의 내용이 워낙 중대하고 또 전 세계의 신자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저희는 최선을 다해서 교회의 정통 가르침에 부합하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또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황청에서는 저희 출판물들을 주의깊게 검토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점이 있다면 교황청에서 이를 지적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이 곳의 방침입니다. 지금까지는 교황청으로부터 좋은 내용의 편지들을 받았지만, 저희의 신중하려는 노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동시에 저희는 진리와 사실에 대하여 양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광주 대교구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클라렛 선교 수도회가 공지문 상의 사목 지침에 순응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며, 그러나 그 수도회의 한국 지부가 전 세계의 클라렛 선교 수도회를 대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희가 게시판에 올리는 편지들 외에도 수많은 이들의 반응을 저희는 계속해서 보고 듣고 있습니다. 나주에 관한 많은 정보에 접해온 그들은 현 상황의 파악을 상당히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갈등들을 어느 정도의 차이들은 있겠지만 그들 또한 자기들 주변에서 겪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사, 성모 신심, 교황님의 교도권과 주교님들의 교도권에 관하여, 기타 교회 안의 많은 문제들은 그들도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겪어야 하는 사안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현재 한국에서의 상황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통적인 가톨릭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염원과 노력은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표출되어있고 적극적으로 구체화 및 조직화되어 있습니다. 이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만이 아니고, 예를 들면 저희가 거의 활동하지 않고 있는 필리핀같은 곳에서도 수많은 신자들이 나주 관련의 현황에 대하여 얼마나 가슴아프게 생각들 하고 계시는지 한국에서도 좀더 아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만약 광주의 조사 위원회에서 실속있는 조사를 제대로 하고, 또 공지문에서도 가톨릭 교리와 저촉됨이 없이 신자들이 납득이 될 수 있도록 "잘 조사해보았으나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설명을 하셨더라면, 신자들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어느 몬씨뇰께서 말씀하셨듯이, "나주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데 힘들게 조사할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라는 식으로 실질적인 조사를 기피했다는 것은 이미 명백해진 사실입니다. 조사 위원회의 지도적인 위원들께서는 조사가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부정적인 결론을 가지고 계셨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주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라고 단정한 부분에서 교회의 교리들이 잘못 제시되었다라는 지적이 거듭 나오고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지적이 옳은 것이어서 공지문의 결론적인 판단이 교리의 부정확한 제시와 해석에 기초를 두고 있다면 이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 광주 대교구에서는 이러한 지적이 틀렸다면 왜 틀렸는지를 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리고 교황청에서 수긍하실 수 있도록 설명해주셔야 합니다. 또는 만약 그러한 지적에 일리가 있다면 한 시라도 빨리 필요한 시정을 해주셔야 합니다. 아무도 그러한 시정 조치로 인하여 교구의 교도권이 약화된다든지 위신에 손상이 된다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또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현재와 같은 현대주의적인 오류들이 판을 치는 여건 속에서 그러한 압력들을 이겨내고 정통 교리에 충실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신다면 모든 신자들이 깊은 감사와 칭송을 드리게 될 것이고, 진리에 참으로 봉사하는 교도권은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신자들은 그러한 충실한 설명 또는 필요한 조처를 청할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교회법 제213조 참조). 그리고 사목자들과 평신도들 모두는 하느님의 진리를 추구해야 하며, 진리에 어긋나는 그 어떠한 가르침도 피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교회법 제748조 제1항 및 제750조), 다른 이들이 그들의 양심을 거스리도록 강요할 수 없습니다 (교회법 제748조 제2항).

그러므로, 지금 현안 문제가 되는 것은 나주에 대한 분별만이 아닙니다. 공지문 상에 나타난 현대주의적인 오류를 밝히고 이로써 교회의 정통적인 신앙을 수호하는 일이 더 급합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들을 진보적 개혁을 위한 계기로 삼아서 그 동안 교회 안의 정통 가르침들을 퇴색하게 하고 이를 마치 긍정적인 발전인 것처럼 자랑스러워 해온 것이 한국 교회를 포함한 현대 교회의 모습의 일면입니다. 그러한 사상을 주도하신 신학자들은 이미 상당 기간 동안 그런 방향으로 한국의 교회를 이끌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주에서의 일들은 그와 같은 신앙의 현대화를 탈피하고 정통적인 교회의 교리들과 신심으로 되돌아오며 이를 더욱 강화하고 활성화하라는 내용이므로, 그 신학자들이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며, 사실 그분들이 평소에 별로 존중하지도 않는 교도권을 내세워 신자들의 신앙과 양심의 발로를 막고 있는 것입니다.

진보적인 신학을 옹호하며 정통적인 신앙을 경원시하기 위하여 신자들을 강제로 떠미는 것은 잘못하는 일입니다. 나주 경당에 순례자들이 와서 기도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주님과 성모님을 사랑하고, 고통받으시는 그분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오는 것을 강제로 막는 것은 무리이며, 진리를 지키고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교회의 모습으로서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에게 강제로 그의 부모님을 인정하지 말라, 찾아가지 말라, 도와드리지 말라. . .고 욱박지른다면 이는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 부모님이 진짜 부모님이 아니라면 이를 확실하고도 친절하게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그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입니다. 그 아이가 계속해서 부모님을 찾아가는 것은 명령을 거스리고저 함이 아니라, 부모님을 배반하거나 무관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어느 신학교의 교수께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셔서 성모님께서 동정녀로서 성령에 의하여 아기 예수를 잉태하고 낳으셨음을 부인한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분이 성체는 예수님의 몸을 상징할 뿐이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강의를 듣는 학생의 올바른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히 교수님께 질문을 드리고 납득이 될 때까지 설명을 요구해야 할 것입니다. 설사 퇴학 처분의 조치가 취해지려 한다고 하드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입니다. 진리를 외면하는 순간 인간의 존엄성은 땅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경당에서 순례자들이 와서 함께 기도드리는 것은 공식적인 기도회의 형식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전처럼 율리오 씨나 율리아 씨가 참석하는 것도 아니고, 나주의 협력자들이 사회나 진행을 하는 것도 아니며, 나주에서 주최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리고 외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는 사적인 신심 행위인데, 신자들에게 그것이 거부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이 분도 드림
미국 오레곤 주 그레샴 시
1999년 8월 26일